[귀농 이야기](3)무·단호박 재배 김형표 씨

[귀농 이야기](3)무·단호박 재배 김형표 씨
새벽 4시 시작되는 하루가 행복
  • 입력 : 2011. 01.27(목) 00:00
  • 백금탁 기자 haru@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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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귀농 4년차인 김형표씨가 귀농빈집정비사업 지원을 받아 개·보수한 보금자리에서 가족과 함께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사진=백금탁기자

아들과 나선 제주여행이 귀농 출발점
농사 배우는 대가로 매일 노동의 연속
"채소 가꾸며 가족의 소중함도 깨달아"

"이미 고령화된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 많다. 밭일 등 일당을 받으면서 배우고 무엇이든 부딪치다보면 농사에 하나둘씩 눈을 뜨게 된다. 부지런하다면 이미 귀농은 성공한 셈이다. 제주만큼 귀농하는데 좋은 여건을 갖춘 곳도 없다."

지난 24일 눈날씨 속에 만난 김형표(39)씨는 동네청년 모습이다. 궂은 날씨로 작업이 없는 터라 아침 댓바람부터 땔감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농사를 배우는 대가로 지인의 부탁을 노동으로 대신하고 있단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종일 부지런히 자신의 몸을 놀리는 것이 즐거움이라 했다.

금오공대 산업공학과 출신인 그의 '귀농일기'는 오래지 않다. 2007년 7월 무작정 서울 강남에서 원어민 영어강사를 인터뷰해서 학원에 소개하는 일인 리쿠르터를 하던 그가 제주에 정착한 것은 우연이었다. 아들(도균·14)과 제주여행에 나섰다가 온평리에 집을 얻어 살기 시작한 게 귀농의 시작이다.

온평리를 떠나 현재 난산리에 정착한 것은 2008년 6월. 그에게 있어 제주 정착은 쉽지만은 않았다.

"서울생활은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랐다. 하루 18~19시간을 일에만 매달렸다. 아이와의 대화시간도 없었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판단에 무작정 제주를 찾았다. 하던 일을 부업으로 돌리고 과외도 했다. 제주에서 한달 50만원이면 생활하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온평리를 떠나 난산리에 정착하면서 당근·무 파종과 수확, 감귤원 농약 살포, 남의 밭에서 돌을 치우는 일 등 닥치는대로 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농사를 배웠다. 그런 과정속에 농사를 지어도 충분히 살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의 귀농에는 행운도 따랐다. 귀농빈집정비사업 지원을 받아 현재 거주하는 집을 단장했다. 사업비 500만원을 지원받아 화장실이며 보일러, 주방을 개·보수하고 방수문제도 해결했다. 2009년 9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농업인턴제 연수도 받았다. 난산리 토박이인 오왕준(52)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귀농후 2001년 헤어져 살던 아내(최미애·37)와 지난해 7월 재결합해 함께 살고 있다.

"짧지만 제주 생활은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다. 갖가지 채소를 가꾸면서 가족에 대한 소중함도 배우고 있다. 지난해 단호박 6600㎡와 월동무 6600㎡를 재배했다. 큰 이익은 없지만 만족한다. 땅이 주는 정직함에서 삶의 가치와 모토를 찾았다. 아이에게도 그런 정직함을 배워주고 싶다."

그는 야무진 포부도 밝혔다.

"10년만 버티면 결과는 나올 것 같다. 주변에서 연간 1억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부농을 많이 봤다. 부지런함과 쉴새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부를 얻고 있다. 45세 이전까지 단호박, 무 등 유기농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유통의 구조적 문제와 계약재배의 문제점, 귀농인의 집 마련 등 귀농인을 위한 행정적 배려도 필요하다."

그는 차가운 칼바람 속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월동무를 닮아가고 있다. 세파의 쓰고 매운 맛을 넘어 모진 한파에도 단맛을 내는 성숙감으로 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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