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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
[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13)구덕
갈빛 구덕안에 고단한 섬 여인의 일상
입력 : 2007. 05.18. 00:00:00

▲오랜 세월 구덕과 차롱을 걸어온 제주시 도련2동의 변규서씨(왼쪽)와 서귀포시 호근동의 김희창씨, 뻣뻣한 대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날줄씨줄로 엮어 짜며 맵씨나는 바구니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손가락은 성할 날이 없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20~30대 남자 겯던 일 이젠 노인들의 몫으로

등에 지는 섬의 풍습…직사각형 바구니 제작


 지난 15일 서귀포시 호근동의 호서노인회관. '독독독독' 나무 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리듬악기의 연주처럼 들렸다. 가늘고 길게 쪼갠 대나무를 매끈한 바닷돌위에 올려놓고 납짝하게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구덕(조금 큰 바구니), 차롱(대나무를 쪼개어 네모나게 결어 속이 깊숙하고 뚜껑이 있게 만들어 음식 따위를 넣는 그릇) 등을 만드는 재료였다.

 1930년대 제주섬을 찾았던 기록을 '제주도'라는 책에 남긴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는 "제주도에는 다른 곳보다 대가 풍부해 많은 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구니류다"라고 했다. 당시 그가 만난 제주의 여인들은 가느다란 대오리로 엮어 만든 가는대구덕을 외출할 때 반드시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며 이를 진기한 풍속의 하나로 소개했다.

 제주에선 다른 지역처럼 바구니를 머리에 이는 게 아니라 등에 지거나 옆에 낀다. 그래서 제주섬의 구덕이나 차롱은 네모난 모양이 대부분이다. 구덕이나 차롱 같은 대그릇은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허리에 차고 다니는 구덕이란 뜻의 찰구덕엔 나물을 캐거나 해조류를 따서 넣었다. 제사 음식을 담아두는 적차롱, 허벅을 담고 물을 져나르던 물구덕, 제주식 요람인 애기구덕, 반짇고리를 뜻하는 바농상지, 점심밥을 담아가는 그릇인 동고량 등이 있다.

 구덕이나 차롱을 결어서 생계를 이어갔던 이들이 많았다. 서귀포시 호근동의 김희창씨(68)도 그중 한 명이다. 열세살때부터 줄곧 구덕을 결어왔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먹고 살 일을 찾다가 구덕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선 노인 일자리 창출사업으로 구덕을 제작하고 있지만 20~30대 남자들이 주로 하던 일이다."

 제주시 도련2동의 변규서씨(70)도 50년 넘게 구덕을 겯고 있다. 집 한 귀퉁이에는 지난 1월 눈 내릴 무렵에 베어왔다는 대나무가 잔뜩 쌓여있었다. 크고 작은 구덕은 물론이고 잔뜩 모양을 낸 바구니도 찾는 사람이 있어서 따로 만든다. 그는 "마을에 구덕 만드는 사람이 40명이나 되었던 적도 있다. 지금은 누가 이런 걸 만들겠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들의 손엔 늘 생채기가 나있다. 족대(이대·세공재로 주로 쓰이는 대나무)를 베어내 조를대(그릇을 지그재그로 엮어가는 아주 가는 대), 놀대(그릇의 밑바닥과 기둥을 이루는 대), 바우대(제작을 마무리하면서 테두리를 칭칭감는 대) 등을 장만한다. 속껍질을 부드럽게 만들거나 0.1㎝ 두께로 대를 가늘게 쪼갠 뒤 이것을 하나하나 엮어짜는 과정은 만만하지 않다.

 구덕 제작이 '기업형'으로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1950년대 후반 대정 오일장 근처에 일종의 '구덕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김희창씨의 증언이다.

 "교회집사였던 사람이 제주 전역에서 구덕을 잘 만드는 사람을 모집했고 도련, 하예 등에서 10명쯤 모여들었던 기억이 있다. 열일곱이었던 나는 그중 어린 축에 속했고 한달에 1천5백원까지 받았다. 최고 액수였다. 구덕이 곱지 않으면 7백50원도 받았으니까."

 제주시 도련2동,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었던 죽세공단지도 제주섬에서 구덕이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했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굿 시즌'이 이어진 지난 3월만 해도 구좌읍 송당과 조천읍 와흘 본향당 등에선 정성스런 제물을 담은 구덕이 제상 주변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구덕과 차롱은 그렇게 섬 안에 살아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도련 토평은 한때 죽세공단지…감귤 재배로 수입 늘면서 해체의 길

 "집집마다 똑딱똑딱 대 두드리는 소리 맨돈지. 물구덕 그리워라."

 1960년대 무렵 제주시 도련 2동에서 불려졌던 노래의 가사다. 맨돈지는 매촌(梅村)으로 불리는 도련 2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은 한때 구덕으로 이름을 날렸다. "맨촌 구덕은 눈감앙 사도 곱다(매촌에서 만든 구덕은 보지 않고 사도 곱더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제주시는 1987년 도련 2동을 농어촌부업단지로 지정한다. 구덕, 차롱이 생산품목이었다. 구덕을 만들어 판매해 마을 노인들에게 두어차례 경로잔치를 벌일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도련 2동엔 농어촌부업단지 조성 이전인 60년대 중반에 죽세공단지회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서귀포시 토평동은 1968년 죽세공부업단지가 들어선 적이 있다. 토평동은 집집마다 대나무를 심어놓고 이것을 베어다 구덕을 엮었을 만큼 죽세공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금은 구덕을 겯는 사람이 없다.

 죽세공 부업단지에는 당시 국비를 포함해 1백60여만원이 투자됐다. 부업단지 첫해에 생산량이 3만2천1백65점, 판매액이 6백52만4천원에 이른 걸 보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토평동 사거리 인근에 작업장을 두고 대밭까지 사들였을 정도로 의욕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80년대 들어 소멸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마지막까지 구덕을 결었다는 오두홍씨(70)는 "6·25 전쟁 이후엔 없어서 못팔 정도로 판로가 좋았다. 그러다 플라스틱 바구니가 들어오면서 어려워졌다. 죽세공단지회의 빚이 늘어났고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서 단지도 해체됐다"고 말했다.

 두 마을에 있던 죽세공단지의 소멸은 공교롭게 감귤나무의 등장과 때를 같이한다. 감귤 재배가 새로운 소득원으로 떠오르면서 구덕을 겯던 사람들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토평동에선 구덕의 재료인 대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감귤나무가 심어졌다. 구덕 마을이던 도련2동은 10가구중 여덟가구꼴로 감귤농사를 짓는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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