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민속오일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쇠구덕을 고르고 있다. 제주형 요람인 아기구덕은 대나무에서 쇠파이프로 재료가 바뀌면서 또다른 문화유산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아기 재우던 장방형의 대바구니…중간쯤엔 우물井자 모양의 그물 쇠파이프 재료 구덕도 생활유산 '웡이자랑 웡이자랑 웡이자랑 자랑자랑 웡이자랑/ 우리애기 잘도 잔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애기 자는 소리/ 우리애기 노는 소리/ 웡이자랑 웡이자랑/ 웡이야 자랑아/ 웡이야 자랑아….' 귀에 익은 노랫말일 것이다. '웡이자랑 웡이자랑'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아기구덕 흥그는(흔드는)소리'다. 아기구덕을 끌어안고 어머니가, 혹은 할머니가 불렀던 달콤한 자장가였다. 제주섬엔 아기구덕이 있다. 대오리로 엮어 만든, 아기를 눕혀 재우는 장방형(長方形)의 바구니다. '제주어사전'엔 이를 제주도 특유의 육아기구로 써놓고 있다. 아기구덕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집안마다 주문하는 게 조금씩 다른 탓이다. 최근 서귀포시 호근동 김희창씨가 엮은 아기구덕은 길이 66㎝, 폭 33㎝, 높이가 23㎝쯤 됐다. 여느 구덕이나 차롱(본보 5월 18일자 7면)에 비해 대의 굵기가 두껍다. 아기를 눕혀 재우는 몇해 동안 아기구덕을 끊임없이 흔들어야 하는 탓이다. 얇은 대오리를 쓰면 오래가지 못한다. 바닥과 입구의 중간쯤에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끈을 그물처럼 얽는 게 포인트다. 김희창씨가 제작한 아기구덕은 14㎝ 높이쯤에 그것을 장치했다. 구덕 밑바닥에 아기를 곧바로 누이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년 넘게 제주시, 서귀포시 오일시장에서 제주산 죽세품을 팔고 있는 강춘생씨(76·제주시 도련2동)의 말이다. "아기구덕 중간쯤에 새끼끈을 서로 엮어 만든다. 그 위에 보릿짚을 깔고 천을 덮는다. 갓난 아기가 그대로 소변을 보더라도 보릿짚이 빨아들인다. 여름엔 보릿짚위에 삼베를 깔았다." 구덕 가운데 부분을 엮는 재료는 질긴 칡덩굴 같은 것을 썼다. 요즘 만들어지는 아기구덕엔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노끈을 이용한다. 아기구덕의 빛깔과 부조화를 이루는 듯 해 아쉽다. 아기구덕은 다른 구덕이나 차롱보다 비싼 가격에 팔린다. 굵은 대를 엮는 게 힘겨운 데다 아기구덕은 깎지 않고 사간다는 속설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대나무로 짠 아기구덕은 1960년대 중반 무렵 '쒜(쇠)구덕'이 나오면서 설 자리가 좁아진다. 하지만 이는 여러 생활문화유산이 현대화에 밀려 형체를 잃어가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재료가 바뀌고 모양이 조금 달라졌을 뿐 쇠구덕은 아기구덕을 썼던 제주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이어받고 있어서다. 제주시 삼도2동에서 재성기업을 운영하는 박연석씨(66)는 '유아용 조립식 흔들침대'로 특허를 땄다. 흔들침대는 다름아닌 쇠구덕이다. 전남 강진 출신으로 10대에 제주에 정착한 그는 45년전쯤, 표선면에서 우연히 아기구덕을 봤다. 바닥이 평평해서 아기 재우는 사람들이 힘들겠구나 싶어 밑을 둥그렇게 만든 쇠구덕을 고안해냈다. 초기엔 건축현장에서 나온 폐고무를 썼는데 무게 때문에 방바닥에 자국이 생겼다. 10여년쯤 뒤 가는 쇠파이프로 재료를 바꿨다. 침상격인 중간부분은 스프링으로 처리했다. 아기구덕의 제작 원리 그대로 만들었다. 1997년엔 아예 특허를 냈다. 쇠구덕은 요즘 한달에 30~40개씩 주문이 들어온다. 시장 상인들이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혼자서 쇠구덕을 만드는 박연석씨는 "20년전쯤만 해도 한달에 백개가 넘는 주문이 이어졌지만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면서도 "나이 지긋한 분들은 딸, 며느리, 손녀에게 아이 잘 키우라며 지금도 쇠로 만든 아기구덕을 장만해준다"고 말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남자가 왜 구덕을 엮을까 ▲서귀포시 호근동 김희창씨가 엮은 아기구덕 "예전엔 여자들이 아이를 낳은 뒷날부터 밭으로 향했다. 이때 아기구덕이 필요했다. 갓난 아이를 구덕에 눕히면 함께 밭에 데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귀포시 호근동 호서노인회에서 구덕을 짜는 노인중 한명인 허수영씨(74)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 키우기와 집안일, 밭일까지 도맡아야 했던 섬 여인들에게 아기 구덕은 필수품이었다. 밭일을 하더라도 아이는 여자가 돌봐야 했다. 아니면 아이의 언니 몫이 되거나. 구덕을 엮는 사람들이 대개 남자인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여자들은 집에서 구덕을 엮을 짬이 안났다. 실제 지금 구덕을 짜고 있는 노인들이 그런 이유를 댔다. 1930년대 후반의 제주도풍속을 정리한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씨는 제주여성의 노동 강도를 다음과 같이 썼다. "제주여성, 특히 주부일의 주된 것은 육체적 노동으로 밭갈이 뒤의 흙덩어리 부수기, 파종, 흙밟기, 제초, 탈곡, 맷돌, 절구, 양돈, 양계, 물긷기, 취사, 부역 등이다. 정신적 노동으로는 육아, 부조, 조상제와 집안제사 시행이다." 그렇다면 섬의 남성들은 이 시기에 무슨일을 했을까. 우마목축, 우마를 이용한 농사, 수확시 일부 작업, 숯굽기, 밭갈이가 육체적 노동에 속했다. 정신적 측면에서는 유례적 촌제, 성장하는 남자 아이들의 교육, 계의 감리를 꼽았다. 이방인의 눈에도 남녀의 이같은 노동강도가 불합리하게 비쳐진 것 같다. 이즈미 세이치는 덧붙여 기록해놓는다. "주부는 일가의 가사 일체를 처리하고 남자들보다도 더 바쁘게 생산에 종사하면서도 남자의 지위가 높고 주인은 일가를 독자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재산과 여자들의 노동은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부는 다만 고분고분하게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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