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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
[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18)포구
바다밭 드나들던 무수한 사연을 기억하라
입력 : 2007. 07.20. 00:00:00

▲애월사람들까지 와서 함께 쌓았다는 한림읍 수원리 돈짓포구. 앞쪽에 두 개의 용천수가 보인다. 포구를 이용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있는 곳이 많은데, 돈짓포구도 그중 하나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섬에서 포구는 절대적 존재…외부교역·식량 구하던 길목

마을 주민 공동창작 석조물


 오락가락 비날씨가 잠시 숨을 고른 지난 10일, '조물캐'로 불리는 한림읍 수원리의 돈짓포구엔 배 한척이 외로이 매어 있었다. 포구 앞쪽엔 돌담안에 가둬진 용천수가 보였다. 그림같은 풍경이지만 사람의 발길이 예전같지 않다. 더러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작은 배가 있을 뿐 포구는 박제품마냥 숨을 멈췄다.

 돈짓포구 인근엔 큰물개가 있다. 이곳에선 스무척 가량의 낚싯배가 보였다. 3년전쯤 방파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외형이 달라졌다. 원형은 잃었지만 바다로 향하는 이들이 애용하는 곳이 됐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섬에서 포구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외부와의 교역을 행할 때 포구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바다밭에서 식량을 구하고 육지로 향하는 배를 매는 곳이 포구였다. 해안가 어디든 포구가 있었던 이유다.

 포구는 돌담 모양으로 쌓아 만들어졌다. 대개 배가 드나들기 좋고 물때에도 매어둘 수 있는 곳에 포구를 뒀다. 마을 사람들의 공동 소유였던 포구는 그들의 공동창작 석조물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김종권씨(79·수원리)는 20년전쯤까지 돈짓포구를 이용해 마라도 앞바다까지 나가 고기를 잡았던 이다. 김씨는 "언제부터 돈짓포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포구를 쌓을 때 애월 사람들이 와서 도와줬다는 말이 전해온다. 애월 포구를 만들때는 수원리 사람들이 가서 도왔다"고 말했다.

 귀덕2리 진질포구에서 만난 현성일씨(65)는 "태풍이나 파도에 자꾸 허물어지니까 마을에서 시멘트를 발라서 보수를 했다"면서 "시멘트를 바르기 전에는 포구가 무너지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복구 작업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포구의 변화는 세차다. 시멘트 포구는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다. 뭉텅이로 잘라나가거나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아예 지형이 변한 사례도 있다. '망밭'으로 불리는 귀덕2리의 한 포구는 몇해전 해안도로를 내면서 두동강이 났다. 제법 규모가 큰 구좌읍 하도리 별방진 앞의 한개창은 6년전 방파제 공사로 '얼굴'이 확 바뀌었다.

 변화의 바람을 비켜선 곳도 더러 있다. 하도리 동동 흰모살개포구는 한 예다. 1990년대 초반 관광유람선 사업을 벌일 참으로 포구 인근 우도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계류장을 만들면서 기능을 잃었다. 사업은 끝내 실패했고 계류장엔 적막감이 감돈다. 그런중에 흰모살개포구는 살아남았다.

 고홍임(65) 하도리 어촌계장은 "바다밭의 사정을 훤히 꿰뚫었던 옛 사람들이 쌓은 포구는 작으면서도 용이해 보인다. 무리하게 물길을 바꾸면서 바닷속 환경을 변경시키는 요즘의 방파제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섬의 운치를 담고 있는 흰모살개포구 같은 곳을 잘 가꿔서 문화관광자원으로 변모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으로부터 3백10여년전인 1680년, 제주에 왔던 이증(李增)은 10일동안 제주도를 일주하며 여러 포구를 답사했다. 일찍이'제주도포구연구'라는 저서를 낸 고광민 제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증의 답사지를 따라가며 제주섬의 포구를 면밀하게 분석해놓은 적이 있다. 병선, 어선 등 배의 종류에 따라 포구의 규모가 달랐다. 썰물때라도 배가 뜨는 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 기능을 해줄 이른바 보조포구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광민 학예연구사는 "지난날 포구의 자연방파제나 다름없었던 코지(串)는 방파제 공사로 묻혀지고 있고, 1개 마을 1개 포구의 지원 정책에 따라 지금도 포구는 한없이 넓혀지거나 수심에 맞추려고 그 바닥을 긁어내고 있다"면서 "옛 포구 방파제는 축조기술, 모양, 높이 등이 각기 다르다. 지금은 파괴되거나 변모가 심하게 이루어진 반면 더러는 남아있기도 하다. 이를 정밀 실측, 조사하여 다양성의 의미까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조선시대의 관문 조천·화북포구…포구에 가면 유배문화가 보인다

▲자전거 여행객들이 제주시 화북포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유배의 섬 제주. 포구가 그 사연을 품었다. 조선시대 2대 포구의 하나였던 제주시 조천포구와 화북포구는 그중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조천포구에 가보면 '금당포터'라 새겨진 조그만 빗돌이 있다. 조천의 유래를 말해주는 비문이 담겼다.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기 위해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 일행이 중국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데가 금당지인데, 그곳이 조천이라는 것이다. 서복일행이 이곳에서 '아침에 천기를 보았다'해서 조천(朝天)이란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도 적혔다.

 이 포구 인근엔 높다란 정자가 세워졌다. 연북정이다. 북쪽에 있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실상은 제주에 부임한 관리나 유배객들이 서울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곳이 아닐까. '절해고도' 제주는 그들에게 숨막히는 섬이었다. 연북정에 올라서면 저 멀리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데, 조선 양반들은 그곳에 올라 자신을 데리고 나갈 배를 기다렸을 지 모른다.

 화북포구는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으로 통한다. 이곳에도 포구의 사연을 담은 검은 빗돌이 있다.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 등 대부분의 유배객들이 이 포구를 거쳐 들어왔다. 지금의 제주항 여객터미널 같은 곳이다.

 영조 13년인 1737년, 항만이 불완전해서 풍랑이 일 때는 항내에서 배가 부서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당시 제주에 부임했던 김정 목사는 몸소 돌을 져나르는 등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하는 일에 매달렸다. 포구에는 김정 목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화북포구를 지키고 서있는 사당인 해신사도 섬의 운명을 말해주는 곳이다.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1829년 처음 지어져 중수를 거듭했다. 매년 정월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에는 이곳에서 언제나 해신제가 열린다. 섬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를 향한 지극한 정성과 안전에 대한 갈망이 깃들어있는 곳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될 수 있는 바다앞에선 누구나 나약한 인간이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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