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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의 역사, 제주
[기획/표류의 역사,제주](1)연재를 시작하며
고난의 바당 밖에 새로운 세상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09. 01.01. 00:00:00

▲부모된 자가 아들을 낳으면 내 아이가 아니라 고래의 밥이 될거라 생각했던 옛 제주사람들. 바다는 제주사람들에게 그만큼 절체절명의 존재였지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제주섬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 /사진=이승철기자

숱한 표해류 작품에 외부 향해 열린 제주인 시선
힘없는 백성이 일군 표류의 역사는 곧 제주 역사


사나왔던 바다는 잠잠해져있었다. 파도가 맹렬히 흰거품을 일으키며 밀려들던 게 엊그제였다. 옛 제주사람들의 관문중 하나였던 화북포구. 5백20년여전, 이 바다에서 배를 띄웠던 조선 선비 최부가 남긴 기록을 뒤적여본다. 1488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향 나주로 돌아가기 위해 별도포(화북포)에서 배에 몸을 실었던 그는 풍랑에 떠밀려 바닷길을 헤맨다.

"제주는 멀리 큰 바다 가운데 있고 물길 구백여 리의 파도가 다른 바다보다 더욱 흉포합니다. 진공선과 상선들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지만 표류하여 침몰되는 일이 열에 대여섯이 되어, 제주사람은 앞 항해에 죽지 않으면 필시 뒷 항해에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주땅에 남자의 무덤이 아주 적고 마을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세 곱절 많습니다. 부모가 된 자가 딸을 낳으면 필시 이는 내게 효도를 잘 할 것이라고 말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고래와 자라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배에 함께 탔던 제주 사람이 최부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최부 일행은 간당간당 목숨을 이으며 중국 명나라땅까지 이른다. 파란만장한 여정을 보낸 최부는 1백36일만에 귀국한 이후 '표해록(漂海錄)'을 남긴다.

▶"아들 낳으면 그 아이는 고래의 밥"

표해록을 포함한 표해류 작품은 대표적 해양문학으로 꼽힌다. 표해류 작품은 바다에서 뜻밖의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체험했던 사실과 표류지역의 풍토 등의 견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해놓은 해양문학 작품을 통틀어 일컫는다.

서양의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노인과 바다', '15소년 표류기', '걸리버여행기'같은 해양문학 작품에 친숙한 우리지만 한국의 '표해록'은 낯설다. 이들 작품보다 훨씬 앞서 흥미진진한 바다에서의 모험을 기록해놓았는 데도 그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이에게 항해에 실패해 목적지를 잃고 바다를 떠도는 사건이 잦았다. 지금처럼 항해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뜻하지 않은 날씨로 바다에서 표류하거나 실종된 사례가 종종 보도된다. 표류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한국 해양문학속 표해록에 숱한 배경을 제공한 곳이 제주다. 최부의 '표해록'은 세계적 표류기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등과 더불어 세계 3대 중국기행문으로 이름을 올린다. 얼마전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된 장한철의 '표해록' 역시 해양문학의 보배로 평가한다. 이들만이 아니라 제주 바다를 떠돌았던 옛 사람들이 수많은 표해류 작품을 남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이나 일본, 류큐(오키나와), 안남(베트남), 여송(필리핀), 대만 등지로 떠밀려 갔다가 돌아온 경우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표착한 사례도 보인다.

표류 기록을 더듬어가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일본이나 송나라에 표착했다가 송환되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시대엔 더 많은 표류기가 등장한다. 조선조 임금들은 표류자들이 돌아오면 친히 그들을 불러들여서 표류한 연유나 견문을 묻고 쌀이나 면포 등을 하사했다. 조선시대 표류인들의 경험담은 홍문관이나 승정원 등에서 임금에게 보고했고 이는 '조선왕조실록'등에 대부분 기록됐다.

▶중국으로, 일본으로, 베트남으로

조선시대에 제주 바다를 떠났다가 중국으로 표류한 사례는 최부가 대표적이다. 송경천은 1794년 아들 의명·인명과 함께 진상물을 수송하다 중국에 표류했다. 정의현감이던 이섬 일행도 1483년 중국에 표착해 베이징까지 여정을 이어간 기록이 있다. 이들만이 아니라 김배회 등 7명(1471), 김기손 등 12명(1534), 이개질 등 21명(1542), 부차길 등 22명(1770), 고수만 등 41명(1779), 이방익(1797) 등 많은 이들이 중국에 표류했다. 이중 이방익의 부친 이광빈도 일본 나카사키에 표류했다 목숨을 건졌다.

류큐에 표류했던 사람은 1770년 장한철이 있다. 애월출신인 그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그곳에 표류했다. 그보다 3백년전쯤인 1477년에는 김비의 등 8명이 진상 귤을 수송하기 위해 출발했다가 큰 바람을 만나 류큐에 다다랐다. 김비의 일행의 구술기록은 '류큐풍토기'로 전해진다. 한금광(1457), 양성(1461), 박손(1546), 김일남·부차웅(1726)도 류큐에 표류된 적이 있다.

베트남도 제주 사람들의 표류지였다. 1687년 고상영 일행 24명은 진상마를 싣고 제주를 출발했다가 31일만에 안남에 닿는다. 이후 중국을 거쳐 16개월만에 대정현으로 귀환한다.

일본에 표류했던 사람들로는 1443년 김목·김막 형제를 비롯해 존자암승 사식 등 9명(1484), 정회이(1501), 김공 등 14명(1536), 강연공 등 19명(1540), 정창선(1714), 정의현감 이종덕(1815), 허희일 등 93명(1900)등이 있다. 이중 정회이는 제주에서 뭍으로 향하다 바람을 잘못만나 일본에 1년 넘게 표류했는데, 그가 그곳에서 보고 들은 풍토기를 예조에서 적어 올렸다.

제주로 떠밀려온 외국인들도 여럿이다. 제주로 표류했던 중국인은 명나라 유민이었던 묘진실 일행 28명(1652), 임인관 일행 95명(1667)이 있다. 1545년엔 명의 상선 선원 3백26명이 대정현에 표착한 사례가 있고, 1820년엔 청나라 사람 50명이 제주목으로 밀려들었다.

일본인으로는 1478년에 명나라로 가던 사신인 묘무 일행 3백명이 대정현에 표착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국사의 예우를 다해 이들을 돌려보냈다. 1497년에도 일본 사신 수명이 표착했고 왜선 1척에 탔던 35명이 정의현에 밀려든(1681) 적이 있다.

류큐인중에는 1809년 우도에 떠밀려온 사람이 있다. 류큐국 섬들을 순시하다가 바람을 만나 제주로 왔다는 말에 따라 옷과 식량을 주고 돌려보냈다. 1801년에는 대정현에 외국인 5명이 표류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중국으로 이송했지만 그곳에서도 모르는 일이라며 되돌려져 왔다. 1809년 류큐인에 의해 그들이 여송국(필리핀)사람임을 알았지만 송환할 길이 없었다. 여송 사람은 결국 제주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서양인으로는 1653년 제주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 일행이 있다. 그에 앞서 1627년에도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제주섬에 떠밀려왔다. 훗날 그는 귀화해 박연이란 이름으로 산다.

▶동아시아 평화 다진 표류인의 존재

일찍이 '한국해양문학연구-표해류 작품을 중심으로'를 썼던 윤치부 제주대 교수는 "바다를 극복해야 했던 제주인들에게 표류는 대단히 의미있는 사건"이라면서 "제주의 주요한 기층문화를 이루고 있는 표류와 그를 기록한 표해류 문학은 밖을 향해 열려있던 제주사람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표류의 역사, 제주'는 제주섬 안팎의 표류기를 통해 바다를 품은 이들의 열린 정신을 읽을 것이다. 표류한 이들은 대개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진상을 위해, 상업 활동을 위해 배에 몸을 실은 그들은 뜻하지 않게 표류인이 됐다. 하지만 바다밖으로 나선 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이국의 풍물은 귀한 역사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표류는 뱃길을 개척하고 문화 교류 촉진에 영향을 미친다. 표류인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생환에 적극적인 대외정책도 한몫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로 떠밀려가고 떠밀려온 표류인들은 동아시아 평화를 다지는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연재는 크게 3부에 걸쳐 진행된다. 1부에서는 제주섬에서 바다밖으로 표류한 이들의 기록을 좇는다. 2부는 외국인들의 제주 표류기를 들여다본다. 3부에서는 오키나와로 갔던 김비의 일행의 노정을 탐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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