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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의 역사, 제주
[표류의 역사,제주-2](1)장한철과 청산도
"가히 불쌍한 이들이 섬사람 아니겠는가"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09. 01.16. 00:00:00

▲청산도의 당리와 읍리 전경.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진도아리랑 장면 등을 촬영한 청산도는 1770년대 제주사람 장한철이 표류했던 섬이다. /사진=진선희기자

동트기 전 대합실엔 환하게 불이 켜 있었다. 오전 6시50분 출발하는 첫 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선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날은 마침 뱃길로 50분 걸려 도착하는 완도읍에 장이 서는 날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합실에 있던 10여명은 곧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강풍주의보로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얘기 때문이다. 하얀 눈이 새벽녘 섬에 흩뿌려진 날이었다. 형수가 위독하다며 어떻게든 섬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노인의 말이 이내 칼바람속에 묻혔다.

▶14개 섬 거느린'슬로시티'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 그 유명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무대가 되었던 섬이다. 5분여 돌담길을 휘돌며 진도 아리랑을 불렀던 장면을 이 섬에서 찍었다. 1608년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청산도는 1896년 완도군이 생기면서 청산면이 설치됐다. 완도군의 10.6%에 해당하는 41.87㎢ 의 면적에 유인도 5곳을 포함해 14개 섬을 뒀다. 2008년 12월 현재 인구가 2600명이 넘는다.

▲청산도 사람들을 구한 세 사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망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인 청산도는 제주와 인연이 깊다. 완도에서 약 19.2㎞ 떨어진 이 외딴섬은 동쪽으로 거문도, 서쪽으로 소안도, 남쪽으로 제주도, 북쪽으로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맑은 날이면 제주가 보이는 청산도 사람들은 제주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바다날씨가 궂겠구나 짐작한다. 이 섬에 240년전쯤 제주 사람 장한철(張漢喆)이 표류했다.

"한참 뒤에 놀라 아득한 정신을 차리고 나서 높은 언덕에 더위잡아 올라 평평한 땅으로 나왔다. 이 때 먼저 간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이미 멀리 떠나가서 종적이 아득하였다. 대개 여러 사람들은 정신 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언덕 위로 더위잡아 올랐지만 밤이 너무 깜깜하여 서로 얼굴을 구별하지도 못하였고 또 심신이 혼미하여 막히고 지각이 뒤바뀌고 어그러져 내가 절벽 아래로 떨어짐을 알지도 못하였고, 다만 사람 사는 곳을 찾아 떠나 버렸던 것이다. 내가 손이 곪고 다리가 벌벌 떨리어 10걸음에 9번 구르면서 혹 언덕바지에서 비틀거리기도 하고 혹 들판 개펄에서 넘어져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지름길을 찾지도 못하고 어디로 향해야 할 지 알 수도 없었다."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불렀던 돌담길. 장한철도 이 길을 걸었을까.



▶청산도절목과 연관 깊어

김봉옥·지홍 부자가 낸 '옛 제주인의 표해록'에 실린 '장한철의 유구 표해록'중 일부다. 인용한 대목은 청산도에 막 표착하는 장면이다.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난 장한철은 영조 46년(1770) 12월 25일 과거를 보기 위해 배를 탔다가 표류한다. 다음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하고 낙향해 '표해록'을 쓴다.

장한철 일행 29명은 소안도 서쪽에서 동풍에 밀려 하루종일 남쪽으로 흘러간다. 류큐열도의 호산도에 표착한 일행은 왜구의 습격을 받는다. 이어 베트남 상선에 구조됐지만 제주인이라는 이유로 죽을 위험에 처한다. 급히 작은 배로 옮겨타고 바다로 향하는 데 1771년 정월 초6일 조난끝에 도착한 곳이 청산도였다.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바다에서 겪은 생생한 표류 경험은 물론이고 청산도에서 만난 인물과의 대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완도문화원 김희문 원장은 '표해록'을 통해 '청산도민역잉존혁거조건절목(靑山島民役仍存革祛條件節目·이하 청산도절목)'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청산도절목은 섬 땅 사람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폐단을 거둬들인 계기가 된 상소문이다.

청산도 당리 '서편제' 초가 촬영지로 향하는 길목에 빗돌이 보인다. 1790년대에 과중한 세금 때문에 살 수 없게 된 청산도의 실정을 주민을 대표해 임금께 진정해 섬 사람들을 구출한 김만련(金萬連) 최창세(崔昌世) 김몽희(金夢喜) 3량인(三良人)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불망비(不忘碑)다. 세월이 흘러 비석이 망가져 1916년 다시 세웠지만 초라한 행색이다. 틈이 갈라진 보호벽 안에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비석이 바람을 맞고 섰다.

▲당리 마을 언덕배기에서 바라본 청산도 앞바다. 고요하던 이 바다에 이튿날 강풍주의보가 내려 청산도~완도 뱃길이 한동안 끊겼다.



▶초라한 행색의 삼량인 빗돌

삼량인중 한명인 김만련은 장한철의 '표해록'에 등장한다. "섬 사람들이 모두 와서 함께 나의 일만 고비 죽을 고생에서 겨우 한 번 살아난 마음을 위로하여 주었다. 이 섬사람 김만련(金萬鍊) 김하택(金夏澤) 곽순창(郭順昌) 등 여러 사람이 밤낮없이 서로 이어가며 아주 부지런히 돌보아 주었다." 김희문 원장은 김만련을 삼량인중 한명과 동일인으로 봤다. 또한 '표해록'에서 상소문 따위를 잘 지은 것으로 언급한 김성건은 김몽희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세 명의 백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렴주구의 폐단을 진정한 것은 1797년이지만 그보다 20여년 앞선 장한철의 '표해록'에도 섬 주민들의 고통이 그려진다. "지금 이 섬사람들은 차라리 소중한 소를 잃고 분함을 삭이며 성질을 참는 것이 낫지, 감히 천 이방과 이 선달을 상대로 소송을 하지 못하니(중략). 가히 불쌍한 이들이 섬 사람이 아니랴? 해변을 지키는 수령들이 응당 여러 섬을 기찰해 이런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완도 청산도=진선희기자 /백금탁기자gtbaik@hallailbo.co.kr



"장한철의'표해록' 청산도절목 열쇠"

김희문 완도문화원장



김희문(78·사진) 완도문화원장은 정병욱이 옮긴 연둣빛 표지의 '표해록'을 손에 들고 놓지 않았다. 갈피갈피 밑줄 그은 곳이 보였다.

"청산도민역잉존혁거조건절목을 입수한 때가 1998년쯤이었죠. 한글자씩 읽어가며 우리말로 옮기는 중에 눈앞에 어른거리는 문헌이 있었습니다. 바로 장한철의 '표해록'입니다. 거기에 나온 청산도 사람들의 삶이나 인물 묘사가 청산도절목과 겹치는 겁니다. "

청산도절목을 발굴 소개한 김희문 원장은 어제일처럼 그 날을 떠올렸다. 18세기 섬 주민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은 드물다. 장한철의 '표해록'은 그런 점에서 단비와 같은 존재다. 김 원장은 전설로만 회자되어온 삼량인의 끈질긴 노력을 입증해준 게 바로 장한철의 '표해록'이라고 했다.

"18세기말에는 신문고나 격정으로 임금께 직접 상소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백성의 진정이나 충정이 철저히 봉쇄된 때이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관리의 폐단을 알릴 수 없었던 거죠. 그런 시절에 청산도에 살던 세 명의 주민은 10년에 걸친 6번째 시도끝에 임금의 행차를 격정으로 가로막고 미리 준비해간 호소문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청산도절목은 청산도만이 아니라 완도 등 섬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준 계기가 됐다. 섬 지방에 내려졌던 각종 부조리한 세금과 부역을 줄였고 완도에서 행해졌던 황칠 진상물량조절도 이루어졌다.

"상소문을 지을 때 장한철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추측됩니다. 앞으로 청산도가 청산도절목을 낳은 삼량인을 비롯해 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문화자원 개발에도 눈을 돌렸으면 합니다."

/완도=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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