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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을 빛낸 사람들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5)-④만장굴 탐사 이후
제1부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두려움과 배고픔 이겨내며 값진 탐사 성과 일궈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입력 : 2009. 03.04. 00:00:00

▲부종휴는 빌레못굴 탐사를 통해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빌레못굴 유적 등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사진 정면 안경낀 이가 부종휴. /사진=한라일보 DB

한라산우회 주축 수산굴·미악 수직굴 등 탐사 개가
빌레못굴 유적·유물 발견 전국적 관심 집중
비용 마련 위해 전당포에 물건 맡기기 일쑤


동굴탐사에 대한 부종휴의 열정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1946년 만장굴 탐사는 시작에 불과했다.

1970년 성산읍 수산굴, 이듬해 서귀포 미악(米岳) 동쪽 수직굴 탐사 결과가 이어졌다. 당시 부종휴는 한라산우회를 오래도록 이끌고 있었는데 동굴탐사가 한라산우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새로운 동굴이 발견되면 그 소식이 부종휴와 한라산우회로 전달됐고 목숨을 담보한 동굴탐사가 계속됐다.

#한라산우회와 동굴탐사

한라산우회 회원이던 사진작가 서재철(자연사랑 대표)씨는 지난 2004년 11월 부종휴 심포지엄에서 수산굴과 빌레못굴 탐사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을 들려 주었다.

"69년 2월쯤 부종휴가 회장인 '한라산우회' 동굴탐험부가 첫 동굴 탐사지를 성산읍 수산2리에 있는 수산굴로 정했다. 당시 수산굴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만 동굴이 있다는 것과 일부 주민이 동굴을 조금 답사했다는 기록밖에 없었다. 한라산우회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라산 등반로에 있는 구린굴을 답사했고, 만장굴과 한림 일대의 굴들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수산굴 탐사와 측량에 도전했다."

수산굴 탐사는 대장에 부종휴, 그리고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됐다. 당시 동굴탐사에 필요한 장비는 물론 가장 중요한 랜턴조차 몇 개 없어 조명기기용으로 카바이트등을 만들어 사용했다. 한라산우회는 수산2리 한 가정의 부엌에서 잠을 자며 3박4일 동안 동탐사와 측량을 했으며 24시간 동안 동굴 속에서 작업을 했다.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됐고, 함몰된 곳을 오르내리며, 또 작은 가지굴속을 겨우 기어다니다가 카바이트등이 꺼지면 막힌 구멍을 뚫기 위해 카바이트를 입으로 빨기를 수십 번,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을 했던 것 같다. 동굴 속은 지상보다 두 배 이상의 체력소모가 되는데 식량이 부족해 수산리 주민 집에서 이삭으로 주운 삶은 고구마를 먹으며 측량과 탐사를 했다."

동굴답사는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계속됐다. 부종휴는 경제적인 면에는 워낙 둔감해 주머니가 항상 가벼웠다. 동굴답사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답사비용을 마련하느라 이 물건 저 물건 전당포에 맡겨졌고 배고픔에 지쳐 심지어 주인 몰래 찐감자를 챙겨 먹기도 했다.

부종휴와 한라산우회가 탐사한 성산 수산굴의 진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수산굴은 동굴 길이 4520m로 지금까지 확인된 제주도 용암동굴 가운데 3위, 세계 용암동굴 가운데에는 20위권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분적으로 2층 또는 3층 구조를 보이는 등 가지굴이 잘 발달한 동굴이다. 용암종유와 용암교가 잘 나타나며, 특히 용암선반의 발달이 현저하다.(제주도동굴연구소 동굴연구 제5호, 2008년 4월)

수산굴은 용천동굴과 함께 2006년 천연기념물(제467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특히 세계자연유산 추가 등재 후보군으로 올라 있다. 세계자연유산 보존·활용용역팀은 2008년 12월 최종보고서에서 수산굴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수산동굴은 길이가 4km 이상되는 대형 용암동굴이다. 그 학술적, 자연유산적 가치는 잘 알려지 있지 않다가, 최근 외국의 용암동굴 전문가가 다녀가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 동굴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도 매우 부족하므로 빠른 시일 내에 동굴 내 생성물과 미지형, 동굴의 생성과정 등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세계자연유산 지역으로 추가 신청해야할 지역이다."

#빌레못굴 발견… 전국이 '들썩'

1971년 3월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북제주군 애월 어음에서 길이 11.7km에 달하는 '빌레못굴'이 부종휴와 한라산우회에 의해 전격 발표된 것이다. 빌레못굴의 탐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애월 봉성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는 주민이 '봉성리에 엄청나게 큰 굴이 있으니 한번 조사를 해 줄 수 없느냐'는 제보였다. 조사는 1970년 3월에 시작됐다.

이렇게 시작된 빌레못굴 조사는 몇차례 이어졌으며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세계적인 용암동굴의 면모가 속속 드러난다. 1973년에는 부종휴와 제주대 박행신 교수 등에 의해 동굴내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동물뼈 화석이 발견돼 중앙 문화재위원들에 의한 긴급 발굴조사가 시행됐다. 이어 1975년 영남대 정영화 교수 등에 의해 구석기시대 유적 및 유물에 관해 종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특히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대륙성 동물 갈색곰 뼈의 화석은 현재의 제주도가 1만∼1만5000년전 이전까지 한반도는 물론 중국대륙과 연결됐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평가되면서 제주가 섬으로 바뀌기 이전의 문화변천 양상을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빌레못굴은 1984년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됐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장을 지낸 이영배씨는 부종휴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제주도문화재 및 유적조사보고서를 발간할 때의 일화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빌레못 동굴에서 곰뼈로 보이는 화석이 있다하여 현장을 방문할 때였다. 제주대 박행신 교수, 영남대 정영화 교수 등 5~6명이 현장을 찾았는데 미로 굴로 형성되어 진행이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미로 굴 속에는 거대한 동물의 뼈가 무더기로 있었고, 타제석기 등 구석기 유물이 산재한 것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유적은 당시 부 선생께서 도내의 주요 동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부종휴가 이끌던 한라산우회 동굴탐험부 대원들. 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부종휴이며 오른쪽 끝에 앉아있는 사람이 서재철씨이다.

#고고학에까지 관심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고대의 유적과 유물은 부종휴의 관심을 고고학에까지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한림읍 금릉리 '한들굴'=반원형 석기, 토기파편, 골각기 등 발견(73년 7월) ▷용담동 '먹돌새기'=돌도끼 등 석기, 토기파편 20여점 발견(74년 1월) ▷구좌읍 서김녕=패총 발견, 석기 조개껍질 사슴이빨 등 30여점 수집(75년 1월) 등의 보고사례는 이를 반증한다.

서재철씨는 "몇 년 동안을 굴속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경제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누가 단 한푼도 보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종휴 선생은 여기저기서 그야먈로 동냥질하듯 탐사비를 마련해야 했다. 동굴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부종휴 선생은 그 자리에 있었고 그래서 오늘의 제주 용암동굴 연구의 초석이 됐다"고 회고했다.

제주 세계자연유산 보고서는 앞으로 유산지구로 추가 등재 가능성이 있는 용암동굴을 거론하며 수산굴과 빌레못굴, 소천굴 등을 열거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대한 학술자료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후학들의 노력에 비해 부종휴의 족적은 너무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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