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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의 역사, 제주
[표류의 역사,제주-15](4)하멜 표착지부터 규명을
2부. 외국인의 제주섬 표류기
표류인의 상징적 존재 하멜, 어디서 난파했을까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09. 07.24. 00:00:00

▲하멜기념비가 있는 산방산 자락에서 바라본 용머리해안의 하멜상선전시관. 하멜상선전시관 입구 안내판에 표착지점을 놓고 논란이 있다는 말을 덧붙여 놓긴 했지만 용머리해안 일대에서 하멜기념사업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 시각이 많다. /사진=강경민기자

중문·모슬포·강정·신도리 해안 등 표착설 갖가지
용머리해안 하멜기념비·전시관 적합성 놓고 논란


거친 파도로 용머리 해안 관람을 통제한다는 안내판이 붙었다. 산방산 앞쪽, 용이 바다로 뛰어들듯한 형상에서 이름을 붙였다는 용머리해안은 차르르차르르 흰포말이 거셌다. 용머리 해안 부근에 350여년전 제주를 찾았던 낯선 땅 청년의 이름이 있다. 네덜란드인 하멜이다. 절경 산방산 자락에 하멜기념비가 있고, 해안으로 가까이가면 하멜상선전시관이 세워졌다.

# 1653년 8월 제주섬에 떠밀려

"우리는 노를 내린 다음 즉시 닻을 내렸다. 그러나 파도와 수심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닻을 바닥에 고정시킬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배가 해안가에 세 번 정도 부딪히더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갑판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올 시간도 없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배에서 뛰어내렸고 다른 몇몇은 파도 때문에 사방으로 휩쓸려갔다. "

▲1668년 암스테르당 스티히터 판의 `하멜표류기`에 실린 스페르웨르호 난파 장면을 담은 삽화.



유동익이 옮긴 '하멜 보고서'는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착하던 순간을 그렇게 써놓았다. 1653년 8월 15일의 일지다. 동인도 지역에서 무역활동을 하다가 출항해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이었다. 비를 동반한 거센 바람 탓에 그저 바다에 몸을 내맡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닥쳤다. 선원 64명중 제주 표착 당시 살아남은 자는 36명. 1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그렇게 아름답던 배가 난파선으로 변했고, 한꺼번에 동료를 잃었다.

처음엔 무인도인줄 알았다. 비바람이 잦아들고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사람이 보였다. 1000~2000명에 이르는 기병과 병사들이 그들 주위를 에워쌌다. 손짓 발짓을 해가며 의사소통을 하려했지만 허사였다. 저녁 무렵 항해사가 위도를 측정해 표착지가 북위 33도 32분에 위치한 쾰파트임을 알았다. 쾰파트는 네덜란드 선박에 의해 발견되어 붙여진 제주도의 명칭이다.

# '지영록'에 '대야수 연변' 언급

하멜일행이 탔던 스페르웨르호가 표착한 곳은 어디일까. 2003년 8월 16일 용머리해안에 하멜상선전시관이 개관할 무렵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문제다. 부근에는 이미 1980년에 하멜기념비가 들어선 터였다. 표착 가능성이 희박한 곳에 하멜기념사업을 펼친다는 지적이 많았다.

표착지점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하멜 보고서'나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해석이 각기 다르다. 대포·중문 해안 표착설, 모슬포 해안이나 멜케해수욕장 일대 표착설, 강정 해안 표착설, 대야수 연변 표착설 등이 나왔다. 문헌에 나온 거리와 지형을 추론해 거론하는 표착지다.

이중 대야수 연변(大也水沿邊)은 김익수씨가 번역한 '지영록'(1997)의 '서양국표인기'에 구체적인 지명이 언급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이 기록에는 "계사(癸巳·1653년) 7월 24일 네덜란드인 헨드리크 얌센 등 64명이 함께 탄 배가 대정현 지방 차귀진 밑의 대야수 연변에서 부서졌다"고 썼다.

대야수란 지명과 관련해 역자는 대야수포가 본래 고산 한장 대물(대아물)의 한자 표기라고 말했다. 고산 한장과 도원에서 대물을 길면서 논깍포구를 대야수포로 불렀으나 19세기 이후는 지도상 주로 돈포(敦浦)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맥으로 보아 난파 지점은 고산리 한장과 신도2리 사이의 해변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여 놓았다.

'지영록'에는 '서양국표인기'를 포함해 중국, 일본인 표류기가 실려있다. 이는 이익태 목사가 제주목에 남아있던 등록을 참작해 작성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더한다. 대부분의 표류기에 표류 연유 등을 묻는 문정별단이 첨부되어 있는 점도 관련 자료를 토대로 '지영록'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라일보는 2003년 5월부터 수개월에 걸쳐 하멜표착 350주년을 기념해 해양문화재지표조사 전문가들과 함께 해양탐사를 벌인 적이 있다. 하멜 기념사업의 출발점이 될 난파선과 표착지점에 대한 실체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탐사팀은 이를 통해 "표류 당시 간·만조를 분석한 결과 만조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해수면이 최고 상승할 때 암초에 부딪혀 난파되었다면 조류 흐름과 해저 상황을 볼 때 한장동과 신도2리 일대가 유력한 표착지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대정현의 어느 해안에 떠밀려온 하멜 일행은 당장 고국으로 돌아갈 꿈을 꿨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에서 그들은 13년 28일을 보내야 했다.



표류인에서 조선인으로

하멜일행 통역 맡은 귀화인 박연

하멜은 한국땅에 표류했던 인물중 가장 널리 알려진 외국인이다. 조선 억류 기간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쓰여진 '하멜 보고서'는 '하멜 표류기' 등으로 출판돼 유럽에 조선을 소개했다. 국내에서는 1917년 재미교포 잡지인 '태평양'에 연재되는 것을 최남선이 발견해 그대로 '청춘'이란 잡지에 전재하면서 하멜이 알려졌다. 1939년 역사학자 이병도가 '하멜 표류기'를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하멜 표류기록이 10여종 번역되어 나왔다.

조선땅에 표류한 서양인은 하멜 일행이 처음은 아니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서양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중 '하멜 보고서'에서 주목할 이름이 있다. 하멜보다 앞서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다.

벨테브레는 제주섬에 하멜 일행이 다다랐을때 통역관으로 등장한다. 중국, 일본, 유구국에 표류했던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나라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정부에 이를 알리는데, 그때 벨테브레를 제주로 내려보낸다.

하멜 일행과 벨테브레가 마주한 날은 표류한 지 두어달이 흐른 10월29일. "우리가 서로 손짓 발짓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때까지 조용히 있던 그 사람은, 서툰 네덜란드 말로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암스테르담에서 온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하멜 보고서'는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와 만나던 장면을 무미건조하게 기록해놓았지만 '지영록'은 다르다. 벨테브레가 하멜일행 중 3명을 보고 "나와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뒤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피 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그가 조선에 표착한 해는 1627년. 조선인 박연으로 귀화해 살던 중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았다. 조선 여성과 결혼해 두 자녀가 있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박연은 무기제조에 관여했고 조선군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했다.

박연은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달라는 하멜 일행에게 옷과 먹거리가 남아돌고 신변이 안전한 훈련도감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박연은 "교역하는 일은 전날과는 달라, 다른 나라 상선은 하륙을 허락하지 않아 배위에서 서로 장사하는데 그 나라 사람일지라도 남의 나라에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 하물며 너희들이 타국인임에야.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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