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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의 역사, 제주
[표류의 역사,제주-21](4)이리오모테로 향하다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표류인은 섬의 반쪽만 보고 돌아간 게 아닐까
입력 : 2009. 09.18. 00:00:00

▲나라이 하야토씨가 제주에서 찾아든 이들을 위해 오키나와에 머무는 동안 안녕을 기원하며 유농후치항 바닷가에서 향을 피워올리고 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1477년 7월 그믐에 요나구니 떠나 이리오모테로 이동
성종실록 '소내시마'는 마을중 하나인 소나이 일컬어



"무릇 6개월을 머물고 7월 그믐이 되자 남풍을 기다려 섬사람 13명이 우리를 데리고서 양식과 술과 막걸리를 갖고 함께 한 배에 올랐습니다. 한 낮 반쪽 밤 동안 가서 한밤중에 어느 섬에 도착했는데, 섬 이름이 소내(所乃)시마였습니다."('성종실록'중에서)

일본의 맨 서쪽에 있는 섬 요나구니. 그곳에 표착했던 제주사람 김비의 일행은 이제 이리오모테(西表)섬으로 이동한다. 김비의 일행을 호송했던 사람들은 8~9일 동안 이리오모테에 머물다 요나구니로 되돌아갔다.

# 사람의 손길 뻗지 않은 원시의 섬

이시가키(石垣)섬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40분 정도 흘렀을까. 이리오모테섬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 김비의 일행이 '소내시마'라고 했던 곳은 이리오모테섬의 소나이(祖納)를 일컫는다.

▲지금의 소나이마을 공민관 전경.

이리오모테에 대한 기록은 요나구니와 마찬가지로 1479년 '성종실록'에 처음 언급된다. 언제부터 사람이 섬에 살았는지 정확하지 않다. 이리오모테는 오키나와현의 여러 섬 가운데 오키나와 본토에 이어 두번째로 큰 섬이다. 땅 덩어리가 컸지만 사람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섬의 90%가 아열대 자연림으로 덮여있는데 해안선을 따라 겨우 사람이 살 곳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것은 험한 자연 환경 뿐만이 아니다. 이리오모테는 오래도록 말라리아에 시달렸다. 지금에야 '특효약'이 있지만 옛날엔 두려운 병이었다. 말라리아로 폐촌을 번복했던 마을이 적지 않다. 2차 대전 이후 말라리아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사람이 안주할 수 있는 섬이 됐다.

거친 환경과 풍토병은 한편으로 이리오모테섬이 원시성을 품는 결과를 낳았다. 개발바람이 쉽사리 닿지 않으면서 풍부한 자연을 남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 섬에는 종종 '일본의 아마존'이나 '동양의 갈라파고스'란 이름이 뒤따른다. 사람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자연을 자랑한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야마네코(들고양이) 등 진귀한 동식물의 보고가 이리오모테섬이다.

▲오키나와에서 '우타키'로 부르는 성소에서 바라본 이리오모테의 앞바다. 해상안전을 빌었던 흔적이 보인다.

# 유농후치항에 표류인 실은 배 닿아

김비의가 섬에 도착한 해는 1477년. 그가 이리오모테를 '소내시마'라고 기억했던 것은 소나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소나이는 동쪽의 코미(古見), 호시타테(星立)등과 더불어 이리오모테에서 오래된 마을중 하나다. 험한 지형 탓에 같은 섬이지만 다른 마을로 이동하려면 배를 타야 했다. 표류인을 분산해 돌봤던 요나구니처럼 인근 마을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김비의는 섬의 반쪽만 보고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 김비의의 여정을 따라 섬을 찾았을 때 안내를 맡은 나라이 하야토(30)씨는 가장 먼저 유농후치로 향했다. 요나구니섬에서 표류인들을 싣고 온 배를 댔던 항구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나팔꽃으로 뒤덮인 모래밭이 펼쳐진 한적한 바닷가로 바뀌었다. 이웃한 섬인 요나구니와 이리오모테는 왕래가 잦았다. 제주 표류인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요나구니 배들이 이리오모테섬에 드나들었다. 나라이 하야토씨의 부친인 나라이 마고이치(那良伊孫一·54)씨는 "어릴적엔 요나구니로 갈 때 유농후치항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요나구니와 이리오모테는 인연이 깊다. 1477년에 섬에서 태어난 소나이당이 1510년에 처음으로 요나구니 관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 섬의 교류는 전설에도 남아있다. 요나구니의 젊은이가 매일 밤 홀연히 사라졌다 돌아왔다. 누나가 젊은이의 옷에 실을 매달아 행로를 추적했더니 이리오모테에 갔던 사실을 알게 된다. 이리오모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두 섬의 오랜 관계를 말해준다.

나라이 하야토씨는 제주에서 방문한 취재진을 위해 유농후치항 바다 모래밭에 조그만 향을 피워올렸다. 안전한 바닷길을 기원하고 뜻하는 여정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섬의 마음'이 전해왔다. 5백30여년전 이 섬에서 수개월간 살았던 김비의 일행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오키나와현 이리오모테섬=진선희기자

또다시 섬에서 섬으로

표류기에 구체적 송환루트 담겨


김비의 일행이 요나구니에 표착한 때는 1477년 2월(음력). 그뒤 조선으로 돌아가는 데 무려 2년여가 걸렸다. 1479년 5월이 되어서야 울산에 도착한다.

'조선과 유구'(1999)에 따르면 왜구 종식 이후부터 임진 왜란 이전까지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가 조선 표류인을 송환해온 사례는 12차례. 1453년에 처음으로 표류인을 데려오기 시작해 1546년까지 약 100년 동안 벌어진 횟수다. 그렇다고 조선인이 오키나와에 표류했던 횟수가 그 정도에 그쳤다는 점은 아닐 것이다. 바다를 접한 주민의 상당수가 표류했지만 지방관들이 죄를 면하기 위해 종종 은폐한 일이 있어서다.

김비의 일행이 제주로 돌아오는 과정은 류큐가 조선 표류인을 어떤 절차를 거쳐 돌려보냈는지 짐작하게 한다. 요나구니섬에서 6개월 머무는 동안 제주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섬과 섬을 드나들며 교환되었을 것이다. 요나구니와 이리오모테섬의 오랜 관계에서 보듯 오키나와 섬들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계절풍 등의 기상 조건을 고려하다보니 표착한 섬에서 곧바로 오키나와 본토 나하로 이동하기 어려웠다. 김비의 일행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요나구니에서 나하로 가기 위해 바닷날씨가 좋아질 때가지 기다려 여러 섬을 돌았다. 적게는 한 달에서 많게는 6개월까지 장기 체류하다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곤 했다. 김비의 일행은 나하에서 사츠마로 다시 하카타, 대마도를 거쳐 울산에 다다랐다.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표류인중 일부를 직접 데려왔던 것은 조선과 통교·무역할 기회를 늘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얻는 게 있었다. 조선은 표류인 송환시 오키나와측에 면포 등을 제공했다. 김비의 등 3명을 데려온 일행에게도 그랬다. 면포는 오키나와의 진공품이면서 동남아와의 주요 교역품이었다. 오키나와에서 면포가 자체 생산된 것은 17세기초의 일이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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