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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을 빛낸 사람들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16)-제4부 타케의 제주식물 재발견(하)
관음사 일대서 왕벚나무 첫 채집…세계적 자생지 기원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입력 : 2009. 09.23. 00:00:00

▲20세기초 제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당시의 타케신부. /사진=한라일보 DB

20세기초 제주 성직활동 기간 식물조사에 몰두
제주특산식물 다수 차지… 학명에 '타케' 명명


식물학계에서는 타케 신부가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도 포교에 종사한 때가 한국식물분류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때라고 평가한다. 제주도 특산식물인 왕벚나무도 타케가 1908년 4월 14일 관음사 일대에서 채집한 표본(표본번호 4638번)을 기준으로 독일의 케네(Koehne) 박사가 왕벚나무로 감정함으로써 이 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설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표본은 자생 왕벚나무의 표본으로서는 최초이다.

타케는 제주 체류기간 하루에 여덟 시간씩 식물조사에 몰두했다고 한다. 때로는 그 이상 식물채집과 표본 만들기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식물채집에 푹 빠져 심심할 사이가 없으며 오히려 심신이 편안하다"고 뮈텔주교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나비박사' 석주명은 타케가 세상을 떠나기 10년전인 1942년 '문화조선(文化朝鮮)' 제주특집란에 "서귀포에서 북쪽 2리에 살고 있던 타케는 기회만 있으면 한라산에 들어가 식물표본을 채집, 이를 구주의 학계에 보내고 있었다. 명치 41년(1908) 4월 14일 그는 관음사 부근(해발 600미터)의 한 그루의 벚나무에 꽃이 달려 있는 것을 채취, 자신의 채집번호 4638호의 넘버를 달아 구주에 보냈다"고 적고 있다.

그가 채집한 수많은 종류의 식물표본은 유럽 등으로 보내어져 전공 분야에 따라 각 전문가들의 흥미로운 연구자료가 된다. 이 표본을 연구한 수많은 논문이 프랑스는 물론 영국, 독일, 덴마크, 스위스 심지어는 일본에서까지 발표되었다.

▲프랑스 출신 신부 타케가 1911년 당시 제주에 자생하는 왕벚나무를 일본에 있는 동료 신부에게 보내주고 그 답례로 받은 온주밀감 15주를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원 '면형의 집'에 심었다. 그 때 심은 나무 중 한 그루가 현지에 남아 있다. 이곳 표석에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이 기록돼 있다. /사진=한라일보 DB

전북대 선병윤 교수는 한국식물분류 역사를 정리한 저서에서 "타케가 보내 신종으로 명명된 식물들 중에는 섬잔대, 한라부추, 왕밀사초, 두메담배풀, 섬잔고사리, 반들고사리, 갯취, 좀갈매나무, 제주가시나무, 사슨딸기, 해변취, 한라꿩의다리, 뽕잎피나무 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채집한 것들 중에는 제주 특산식물이 많이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섬잔대(Adenophora taquetii Leveille)', '뽕잎피나무(Tilia taquetii Schneider)'처럼 그를 기념해서 붙여진 학명도 13종이나 된다.

타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주교님께서 떠나신 후(뮈텔 주교는 1907년 8월 10일부터 27일까지 제주도를 방문한다) 저는 곧 여러가지 식물을 거두어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것들이 집안에 가득한데 요즘도 저는 추위와 북풍에 잘 견뎌낸, 제게 없는 식물들을 몇 가지 여기저기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아직도 두 송이의 십자화(十字花)와 두 송이의 성상화(星狀花)를 건조통에 넣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매우 몰두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을 분류하는 일인데 '포리' 신부의 식물도감 덕분에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타케의 제주도 식물 채집은 1907년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은 제주에 오기 전인 1911년에 아오모리의 포리 신부 집에 35일간 머물면서 이 채집품을 감정했는데, 그 양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이는 포리 뿐만 아니라 1913년 제주에 처음 오자마자 타케를 찾아 채집품을 감정했다. 나카이는 1914년 제주도 식물상을 처음 집대성하는 등 제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식물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타케는 1915년 6월 제주에서 목포본당으로 전임되어 활동하다가 1922년부터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곳에서 1940년에 은퇴한 뒤 1952년 1월 27일 영면했다. 그의 묘는 현재 대구시 남구 남산동 천주교구내 성직자 묘소에 있다.

[ 제주감귤과 타케 ] 1911년 서귀포에 온주밀감 첫 도입

10여그루 중 옛 서홍성당 자리에 1그루만 남아
제주 근대감귤 개척… 100주년 기념사업 필요


일본으로부터 온주밀감을 들여와 서귀포지역을 감귤주산지로 성장한 시초는 성직자이자 식물에도 조예가 깊었던 타케 신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가 20세기에 들어와 1911년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제주에는 많은 감귤원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 진상품 생산을 위한 것이어서 주민소득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관의 통제에 의한 재배로 그 민폐가 막심했다. 감귤원을 맡은 농민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게 되므로 일부러 귤나무를 고사시키는 일이 잦았다. 진상제도는 조선조 고종 31년(1893년)에 이르러 폐지되었으나 농민들은 감귤재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제주감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전환기를 맞는다. 이 때가 경제적 소득을 목적으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다. 근대적 의미의 제주감귤 재배의 시작이다. 그 효시는 개화파의 주역인 박영효로 전해진다. 박영효는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일으킨 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후 1907년 9월에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1년간 적거생활을 했다. 그 후로도 유배기간을 합쳐 3년간 제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박영효가 제주에 거주하는 동안 원예작물의 재배를 널리 장려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개량 감귤을 제주시 구남천(구남동)에 심었으나 그가 제주를 떠난 후에는 점차 자취를 감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한 그루도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귀포에 온주밀감을 전파한 최초의 인물은 바로 타케 신부다. 이때가 1911년이다. 훗날 우리나라 최대 감귤주산지로 탈바꿈한 서귀포지역 온주밀감 재배가 타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타케 신부는 1902년 서귀포 '한논성당'에 첫 부임한 이후 1915년까지 서홍(당시는 烘爐)성당에서 선교활동과 식물채집을 하는 동안 일본으로부터 온주밀감(溫州密柑)을 들여와 서홍성당 일대에 심었다. 그가 도입한 온주밀감은 1911년 역시 프랑스 출신 성직자로 일본 아오모리에 주재하던 '포리'(Faurie R. P, 1847∼1915) 신부로부터 받은 묘목이다. 타케는 모두 10여그루의 감귤을 심었으나 지금은 옛 서홍성당 자리에 1그루만 남아 있다.

이를 흥미있게 지켜보던 사람은 서귀포에서 상업을 하던 일본인 '미네'였다. 그는 타케의 경험으로 서귀포 지역에서도 온주밀감의 재배가 가능한 것을 보고 1913년에 많은 묘목을 도입해 서귀읍 서홍리에 심었다. 이 때 조성된 과원이 제주농원이며, 이는 처음으로 규모를 갖춘 큰 농장이었다. 이후 하논분화구 경사지 등으로 재배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제주감귤은 1세기가 지난 21세기에 다시 시련을 겪고 있다. 수입 개방으로 국경없이 넘나드는 과일이 쏟아지고 있으며 제주감귤은 과잉생산과 유통처리난에 시달리고 있다.

제주자치도는 타케가 제주에 온주밀감을 도입한 시기를 근대 제주감귤산업의 시초로 보고 '제주감귤산업 100주년' 기념사업을 검토 중이다. 이 사업은 위기에 처한 제주감귤의 미래 100년을 다시 여는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데서 의미가 있다. 타케가 제주에 남긴 온주밀감이 제주의 효자산업으로 부흥하기 까지는 타케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타케 신부에 대한 재조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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