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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
[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4)옛 등대-③1906년 우도 등간
전쟁의 거친 물결 따라 ‘소섬’에 나무 등대 등장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10. 03.26. 00:00:00

▲1906년 점등했던 제주 최초의 등대를 복원한 우도 등간(앞쪽)과 1919년 벽돌로 쌓아 만든 등대가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일본서 전쟁 치르며 한국에 항로표지시설 설치 요구
정식 등대 건립 이전 일본인 인부 이용 우도에 등간


탁 트인 전망에 마음이 뻥 뚫렸다. 저 멀리 수평선이 눈에 안기는 맑은 날씨였다. 우도봉 산책로를 따라 걷기 여행에 나선 이들은 우도 등대가 있는 곳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등대 아래 놓인 짙푸른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카메라에 추억을 담는 이들이 보였다.

제주의 동쪽 끝에 있는 섬 우도. 제주 등대의 역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섬이다. 1906년 제주에서 처음 불을 켰다는 근대식 등대를 낳았다. 우도 등대는 돌로 쌓아올려 마을 어부들의 뱃길을 비추던 옛 등대(도대불)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서양식 항로 표지가 도입되면서 정부에서 세운 등대다.

▶일본이 세운 도내 최초의 등대

우도 등대는 제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근대식 등대인데다 관련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다. 그중 우도 등대 설치 100주년을 기념해 2006년 복원한 '우도 등간(燈竿)'은 주목을 끈다.

해양수산부가 2004년 냈던 '대한민국 등대 100년사(1903년~2003년)'를 보면 우리나라에 등대가 건립된 배경엔 일본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잇달아 치른 일본은 이 과정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에 항로표지 설치를 요구했다.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가 점등했고 뒤이어 전국 연안에 등대가 만들어진다.

이 무렵에 우도 등대가 탄생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한·일 정부는 합의를 통해 두 나라가 보유한 기자재를 활용해 등대를 짓기로 한다. 공사는 일본측에서 맡았다. 이 때의 명칭이 우도 등간이었다. 등간은 임시 등대 시설에 해당한다. 우도와 더불어 죽도, 울기 등 3곳엔 등대가 아닌 등간을 설치했다.

▲1907년 발행 자료에 실린 우도와 울기 등간의 도면. 이를 토대로 2006년 우도 등간이 실물 크기로 복원됐다.



명치44년(1911) 3월 발행한 것으로 된 '항로표지관리소 제3연보'엔 우도 등간 설치 과정, 참여 인력, 임금 내역 등이 담겼다. 그에 따르면 우도 등간을 제작하기 위해 명치37년(1904) 12월 25일 목재 절단과 조립에 착수했고 이듬해 1월 15일 울기 등간에 쓰일 재료와 함께 배에 싣고 목적지로 향했다. 일본인 공사 감독과 인부들도 그 배에 탔다.

▶도면 입수해 실물 크기로 복원

목재를 실은 배가 우도에 도착한 때는 1월 24일. 등간 설치는 간단치 않았다. 날씨가 문제였다. 우도에 도착하는 대로 측량을 하고 짐을 내리려고 했지만 파고가 높아 결국 1월 31일에야 섬에 배를 댔다. 이튿날부터 바로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온도가 0도~5도까지 내려가 작업에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등간 제작을 마친 날은 2월 26일. 일본인들은 풍랑으로 귀국길에 차질을 빚다가 3월 5일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일찍이 등간이 완성되었지만 점등은 그로부터 몇달 뒤에 이루어졌다. 공식 기록에 등장하는 우도 등대 점등 시기는 1906년 3월 1일이다. 불을 켜기 위한 시설을 더하고 관련 인력을 확보하는 데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지방해양항만청 제주해양관리단으로 바뀐 제주지방해양수산청은 우도 등대 100주년을 기념해 2006년 우도등간을 되살려냈다. 1907년 대한제국 세관공사부 등대국에서 내놓은 '한국등대 1연보'에 실린 우도와 울기 등간의 도면을 어렵사리 입수해 100년전 실물 크기 그대로 제작했다.

현재 우도 등간은 1919년 생겨난 벽돌 재료 등대와 2003년 신축한 현대식 등대 사이에 놓였다. 맞춤한 것처럼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지만 본래 위치는 아니다.

복원물 높이는 8m가 넘는다. 우도 등간 꼭대기에 석유등을 달았는데 도르레로 연결돼 사람의 힘을 빌려 아래위를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는 구조다. 당시 석유등의 수명은 50~60일 정도. 등이 꺼지면 도르레로 내려 불을 켠 뒤 다시 등탑으로 올려보냈다. 1919년 등대는 비상용으로 지금까지 활용되지만 우도 등간은 '상징적인 존재'로만 서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도 등대는 '제주 최초의 등대'란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이에비해 민간에서 사용했던 북촌 등명대와 같은 옛 등대는 그에 값하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등대가 세워진 곳은 늘 빼어난 자연경관"

우도등간 복원 실무 김형준씨


"우도 등간 도면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나 기뻤습니다. 도면엔 실제 크기가 표시되어 있어서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형준 계장(사진·부산지방해양항만청 제주해양관리단 해양교통시설팀)은 1906년 점등한 우도 등간 도면 사본을 내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김 계장은 우도 등간 복원과 관련한 실무를 맡았던 이다.

김 계장은 해양수산부가 '대한민국 등대 100년사'를 만들때 제주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우도 등간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도 등대로 불리기 이전에 '등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실체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실물을 재현하는 게 어려웠다. 우도 등간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우도 등간 도면을 찾아냈다.

당시 제주지방해양수산청은 80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2005년 11월부터 12월까지 한달간 복원 공사를 벌였다. 100년전 일본인들이 우도 등간 제작에 들인 시간과 비슷하다. 우도 등간을 복원해 설치하고 2006년 5월 우도 등대 100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우도 등간이 세워지면서 우도엔 현재 3개의 등대가 있다. 이들 등대는 실물 모습 그대로 국내 등대의 역사를 증거한다.

김 계장은 "우도 등간을 복원하면서 새삼 제주지역의 옛 등대에 대한 관심이 생겨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일부 도대불은 복원을 하면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에도 등대가 설치된 곳은 늘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면서 "등대를 활용해 관광상품을 만들어가고 있는 여러 나라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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