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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포전 한라산을 찾았는데 단풍이 끝물이었다. 며칠 전 내린 첫 눈으로 잎사귀가 쪼그라들고 색깔도 칙칙하게 변해 있었다. 올해는 단풍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헛물만 켠 셈이다. 그런데 도심은 지금에야 단풍이 한창이다. 걸어서 출근하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일부러 바꾸며 걷다보면 여러 색깔의 단풍과 고즈넉한 골목풍경을 볼 수 있다. 거리에도 단풍 든 가로수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만추의 햇살에 물든 가로수와 낙엽들을 보며 가을의 애잔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활엽수인 느티나무를 가로수로 조성, 해마다 시정(詩情)을 돋구게 하는 공무원들에게도 고마움을 갖는다. 단풍이나 낙엽은 시민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필자는 바람결에 흩어지는 낙엽을 보며 종종 '닥터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원작)의 명장면을 반추하기도 한다. '닥터 지바고'는 역사의 격동기-혁명의 혼란속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운명이 결정되던 상황-에서 만난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과 배신, 혁명을 주제로 한 영화다. 유리 지바고는 혁명군에 쫓겨 궁핍하지만 평화가 감도는 전원에서 숨어 살다 시골 도서관에서 우연히 라라와 재회하게 된다. 그 때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벤치 주변에 흩어지는 낙엽의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낙엽처럼 혁명군에 쫓기는 그들의 삶과 운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러시아의 향토악기로 들려오는 라라의 테마곡은 또 어떤가. 필자가 군에 입대하던 날 아침 연병장에는 밤새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점호를 마칠 무렵 아침 눈부신 햇살과 함께 설원(雪原)으로 울려퍼지던 라라의 주제곡(Some where my love)은 30년이 넘도록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누군가도 단풍과 낙엽을 보며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학창시절에 접했던 구르몽의 '낙엽'을 떠올리며 '시몬! 나무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는 한 소절을 읊조리며 늦가을의 숲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제주를 너무나 아끼는 이생진 시인의 시 '낙엽'은 또 어떤가.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 때가 좋은 때다/ 그 때가 때 묻지 않은 때다(후략)'를 떠올리며 젊은 날의 기억, 그러나 지금은 낙엽처럼 빛바랜 추억에 잠길 것이다. 그래서 낙엽은 가을녘 조물주가 도심에서 들려주는 자연의 교향악이거나 천재적 화가가 도심 전체를 캔버스 삼아 파스텔톤으로 그려내는 거대한 명화다. 시민들은 낙엽을 밟으며, 때로는 창가에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낙엽의 군상을 보며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나즈막한 톤으로 삶과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낙엽은, 가을은, 평범한 시민들을 경건한 철학자로 만들고 그들의 교양과 인격을 키우는 자양분(滋養分)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그런 여유와 낭만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낙엽이 지기 무섭게 낙엽을 쓸어담아 어디론가 갖다버린다. 낙엽을 하나의 쓰레기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낙엽수를 가로수로 심었는가. 오동나무를 심은 뜻이 봉황을 보고자 함이라면 활엽수 가로수는 단풍과 낙엽을 함께 보고자 함이 아닌가. 낙엽이 도시와 시민들에게 안겨주는 엄청난 문화적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행정은 안쓰럽다. 낙엽의 계절이 오래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낙엽의 대향연을 없애지 못해 안달해 한다면, 제주시는 그런 삶의 여유와 멋스러움 조차 허용되지 않은 사막과 같은 도시를 벗어날 수 없다. <논 설 실 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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