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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생각
[고희범의 제주생각]말 걸기
10년된 헌 지갑과의 '이별의식'
생각과 말하는 것의 차이는 커
입력 : 2011. 01.27. 00:00:00
지갑이 낡아 새 지갑을 하나 장만했다. 낡은 지갑에 있던 몇 장의 지폐를 새 지갑에 옮겨 넣고 나자 낡은 지갑이 더욱 초라해졌다. 10년 가까이 지니던 지갑을 버리려니 코를 풀고 난 휴지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닌 지갑은 엉덩이 각도만큼이나 휘어 있었다. 한 귀퉁이는 실밥이 풀렸고 매끈하던 가죽은 거칠게 헌데가 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지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말을 건넸다.

"두툼하게 배를 채워 준 적도 별로 없지만 나의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주느라 고생 많았다. 오랜 세월 네가 곁에 있어 든든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안녕!"

별난 '이별의식'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소설가 현기영 선생으로부터 담배를 끊은 경위를 들었다. 남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뜻밖에 같은 생각이나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할 때가 종종 있다. 바로 이 경우가 그랬다.

금연을 하기로 작정한 날 그이는 증오심을 가득 담고 몇 개비 남은 담뱃갑을 꼬깃꼬깃 꾸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나 그의 증오가 담배의 해코지를 불렀다는 것이다. 금연 전보다 담배를 훨씬 더 많이 피우게 된 것이다. 두번째 금연을 결심한 뒤에는 태도를 바꿔 부드럽고 공손한 자세로 담배에 이별사를 전했다.

"그동안 고마웠네. 그대가 없었으면 내가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네. 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들어 몸이 전과는 다르니 어쩌겠나.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네. 잘 가게, 친구."

그이는 결국 금연에 성공했다.

등산을 하던 길에 이리저리 뒤틀린 모양의 나무가 눈에 띄었다. 나무는 주변의 어려운 환경에 맞선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무를 어루만지며 말을 건넸다. "정말 고생많았구나." 나무가 잎을 흔들며 보이는 반응에 신이 난 나는 산을 오르며 눈에 띄는 나무마다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우람한 거목이 나타나면 "대단하다. 멋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아직 어린 나무에게는 "잘 자라라"는 격려를 보내며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일행들보다 한참이나 뒤처지는 것은 아랑곳없이 말 건네기를 계속하는 동안 나무들은 나의 격려와 찬사에 다소곳이 반응했고 나도 모르게 나무에 대해 따뜻한 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치던 나무에게 말을 거는 순간 동화 속 '어린 왕자'처럼 새로운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아무 상관없고 관심도 두지 않던 것들이 특별하고 새로운 존재로 다가왔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말 걸기의 상대가 나무나 지갑이 아니라 사람이면 오죽할 것인가. 거기다 따뜻한 마음까지 품고 말을 건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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