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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보존 활용방안 특집
[유적 보존과 활용 어떻게 할 것인가/국내외 유적 정비현장을 가다](7)서울 암사동유적
을축년 대홍수 휩쓸자 신석기유적이 세상 밖으로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11. 03.30. 00:00:00

▲1925년 한반도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서울 암사동유적. 1979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사회교육적 효율성이 부각되면서 현재까지도 단계적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이윤형기자

단계적 유적 발굴 이후 서울의 대표적 선사공원 조성
고산리유적 발견된지 25년 지났지만 조사·정비 안돼


일제강점기인 1925년 당시 한반도는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해 7월부터 9월초에 걸쳐 일어난 네 차례의 대홍수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인적ㆍ물적피해가 엄청나다보니 이때의 물난리를 두고 을축년 대홍수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당시 대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한강변. 뜻밖에도 이곳에서는 지표면 아래 있던 많은 양의 유물이 포함된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드러났다. 바로 오늘날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암사동선사유적이다. 을축년 대홍수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신석기유적 가운데 하나인 암사동유적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암사동유적은 이어 1957년 정지작업 중 빗살무늬토기편과 주거지가 발견돼 경희대박물관이 긴급 수습조사에 나선 이후 1967년 경희대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대학박물관연합회가, 1968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국립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이 이뤄졌다. 그 결과 암사동유적은 국내에서 알려진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으로서는 가장 대규모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에 의하면 암사동유적은 신석기시대인 6000년 전 무렵을 전후한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유적은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신석기부터 청동기시대와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성됐다.

암사동유적의 중요성은 신석기시대 움집터가 다량 발굴된 데서 엿볼 수 있다. 현재까지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 움집터 30여기 정도가 발굴됐다. 하지만 유적 분포범위에 비해 발굴면적이 한정된 점을 감안하면 훨씬 많은 움집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의 집터는 대략 5기 정도의 소규모 군집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암사동유적은 움집 발굴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선사인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던 대규모 마을유적이라는 점에서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하나, 암사동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류 가운데 관심을 모으는 것은 빗살무늬토기다. 토기의 전면에 문양을 가득 새겨 넣은 것이 특징인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암사동을 비롯 중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신석기문화의 토대가 됐다.

암사동유적은 그 중요성이 인정돼 1979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고, 이후에도 꾸준한 조사와 정비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서울시에 위치해 있다는 입지적 여건을 바탕으로 사회교육적 효율성이 부각되면서 현재까지도 단계적인 정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석기유적으로 국내외에 알려진 고산리유적의 경우는 대조적이다. 고산리유적은 1987년 처음 알려진 이후 1998년 국가사적(412호)으로 지정됐지만 아직까지 조사 정비는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정식 발굴조사 없이 몇 차례의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만 시도됐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지금까지도 정식보고서 하나 펴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고산리유적 현장에 가보면 안내판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이곳이 국가사적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제주시가 관련 학계와 연구자들의 의견을 수렴 정비계획 추진에 나선 것도 더 이상 고산리유적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고산리유적이 처음 알려진뒤 25년이 됐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된지도 10년을 훌쩍 넘긴 만큼 제대로 된 조사연구와 정비작업을 고민해야할 때다.

[ 발굴에서 보존까지… ] 1925년 발견 후 선사유적공원 변신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발견된 암사동유적은 1979년 국가사적 제267호로 지정된 이후 체계적인 정비와 지속적인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정비계획 추진과정을 보면 1988년 암사동선사주거지 개관에 이어 2002년에는 2010년을 목표로 종합정비방안이 시작됐다.

주요 골자는 국가사적지 확대 지정과 여기에다 체험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기존부지 7만8793㎡에 2만3208㎡ 면적이 사적지로 추가 지정됐으며 확대부지 매입이 2008년 7월까지 이뤄졌다.

부지매입과 함께 2008년 종합정비기본계획을 수립, 지난해 확대부지에 사업비 88억원을 투입한 가운데 체험장 조성공사가 마무리돼 첫 선을 보였다.

선사체험마을은 기존 선사주거지 옆에 총 면적 2만3000여㎡ 부지에 움집군락 등 다양한 체험장을 조성했다. 중앙에 위치한 움집군락을 비롯 어로, 수렵, 발굴 체험장과 화살, 토기만들기 등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중앙에 움집군락이 있어서 학생들은 체험강사로부터 움집설명을 듣기도 하고, 미니움집을 만들거나 원시복을 입어보기도 한다.

암사동유적은 기존 시설인 제1, 2전시관과 복원움집 9기 및 체험움집 1기에다 새로이 체험장이 문을 열면서 보존과 재현은 물론 체험까지 가능한 선사유적공원으로 재탄생 됐다. 이처럼 암사동유적은 순차적인 종합 정비가 꾸준히 이뤄지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선사유적공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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