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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규칼럼
[강문규 칼럼]삼성신화에 깃든 쿨한 이야기들
입력 : 2011. 09.20. 00:00:00
추석이 지난 성산읍 온평리 해안을 따라 걸으며 동해 쪽에서 광휘로운 햇살을 받으며 배 한척이 다가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제주선인들은 뛰어난 스토리텔러 작가들이었다. 작은 섬안에서 만들어 낸 숱한 신화들을 접할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든다. 탐라개벽의 삼성신화도 그렇다. 한반도에서 만들어 낸 개국신화들은 솔직히 황당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삼성신화는 한 편의 잘 짜여진 스토리로 엮어져 있다. 어느날 모흥혈에서 세 신인이 용출했다. 이는 화산섬 제주의 지질학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금방 이해가는 대목이다. 즉 혈거생활의 반영이다. 제주선인들이 용암이 흐르며 형성된 동굴, 즉 바위그늘집을 선사시대부터 주거시설로 이용해 왔다. 세 신인도 삼성혈이라는 바위그늘집을 터전으로 살아간 인물들이라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삼을라가 배필을 맞이하는 과정과 의미도 흥미롭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아가던 이들은 어느날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세 공주를 신부로 맞이 한다. 그리고 벽랑국이 보내 온 오곡의 씨앗과 가축을 받아들여 수렵시대를 마치고 농경의 시대를 열게 된다. 주목할 점은 제주선인들이 개벽신화에서부터 외부의 여인들을 맞아들여 혼례를 치르고 자손을 번성케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탐라의 열린 의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급속히 다문화사회로 나아가는 제주사회가 이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지를 선언적으로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신화는 주변 스토리가 깔리며 흥미를 더 한다. 삼을라가 세 공주와 혼례를 치렀다는 혼인지 곁에는 작은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명이 비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다. 온평리 바닷가에서 만난 삼을라와 세 공주가 이곳에서 초혼례를 치렀다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 활을 쏘아 삼을라의 거처를 정했다는 스토리 구성도 매우 뛰어나다. 이는 어느 일방이 야비한 꼼수를 두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삶의 터전을 정했다는 점에서 후세의 귀감이 된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대단히 쿨한 이야기다. 그런 신화적 스토리를 조선시대의 문화적 안목과 감성이 뛰어났던 김정 목사는 삼사석(三射石)을 정비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

탐라가 매우 쿨한 사회였음은 칠성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삼을라가 분거했던 지역이 어디인가에 관한 논란은 최근 칠성도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지금의 제주시 일도, 이도, 삼도지역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1530년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을라가 처음 나온 뒤 일도, 이도, 삼도를 정하고 그곳에 북두칠성 모양을 모방해 칠성도를 축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어느 일방이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결속과 단결을 통해 탐라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칠성도가 일도, 이도, 삼도를 하나로 엮고 있는 형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갈등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제주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14년에 제작된 제주 최초의 지적도(地籍圖)에 나타난 제주성내의 취락형태이다. 당시는 탐라사회부터 전개돼 온 제주성내의 원형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다. 지적도를 보면 제주성안이 칠성도가 세워져 있는 일도, 이도, 삼도를 중심으로 밀집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마치 꿀을 바른 나뭇가지에 벌떼가 몰려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일찍이 서울대 전경수 교수는 삼성신화는 허구의 스토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했다. 그의 지론에 공감하면서 삼성신화를 다시 읽게 된다. 전어철이 되면 집 떠난 며느리도 돌아오듯이 탐라문화제가 열리는 계절에는 한번쯤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생각해 볼 일이다.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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