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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4)
얽히고설킨 인척관계 명문가의 재탄생
입력 : 2012. 01.30. 00:00:00

▲이익 제자 중 대표적 인물 고홍진은 풍수지리에 능해 조선 제주의 3대 명인으로 불렸다. 사진 위는 제주시 해안동에 있는 고홍진 부부 묘. 고홍진과 그의 손자 고원·증손 고만첨 묘는 당시 무덤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오른쪽은 고만첨 묘 문인석.

조선시대 제주 삼대 명인 고홍진 집안과도 사돈
동계 정온과 주고받은 시문 '간옹유고'에 전해

모든 유배인이 유배생활 중 혼인을 하거나 혹은 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리안치 유배형은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킨 감금조치였기 때문에 상당수 유배인들이 독신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제주에 유배온 사대부 중 반역죄를 저지른 유배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자를 얻어서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익 역시 유배 중인데도 김만일의 딸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를 잃어 홀아비 신세였기도 했지만 제주목사 이괄이 그를 동몽교관으로 삼을 만큼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익이 당시 제주에 먼저 유배와 있던 동계 정온과 주고받은 시에는 정온 또한 제주에서 첩을 얻어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져 유배인의 혼인과 축첩이 흔한 일이었음을 알려준다. "가엾어라 그대의 아들 잃은 눈물, 더구나 어린 양과 같은 재롱둥이였지. 자애출천(慈愛出天)은 비통하지만 상심이 지나쳐 병이 생겨서도 안되는 일이거늘. 손을 들어 바라보는 백성들도 슬퍼하니 귀중한 몸 잘 보호하소서." 정온이 제주에서 얻은 어린 아들이 죽자 이익이 정온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이 시는 '간옹유고'를 통해 전해진다.

동몽교관에 임명된 이익은 언제 풀릴 지 모르는 귀양살이 속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 혼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 중 대표적 인물인 고홍진과 김진용은 마침 이익이 유배오면서 데리고 온 장남 이인실과 비슷한 나이여서 서로 자극을 주며 학업에 정진한 결과 문과 급제 등의 성과를 일궈냈다고 할 수 있다. 이익 입장에서는 유배생활 중에 유학자로서 학문의 목적이자 큰 보람이라 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이라는 결실을 맺은 셈이다.

제자 중에서도 성균관 전적 벼슬을 받아 고전적이라 불리는 고홍진은 남다른 기행 때문에 많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제주도가 지난 1985년 발간한 '제주도전설지'에도 그의 이야기들이 실렸다. 유학자이면서도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고홍진은 어렸을 때 자신이 공부하러 다녔던 서당 훈장이 세상을 떠난 뒤 명당자리를 봐달라는 후손들의 간청에 명당 대신 험지를 지정해 묻게 한다. 이를 알게 된 암행어사가 꾸짖자 고홍진은 스승이 쇠꼬챙이로 찌르면서 학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원수를 갚으려 했다고 답변한다. 고홍진은 의술에 능한 좌수 진국태, 주역으로 유명한 현감 문영후와 더불어 제주가 낳은 삼대 명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익이 제주에서 키운 제자들은 이후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도 이익과 김만일의 후손들과 인연을 맺으며 인맥과 학맥을 이어갔다. 그렇게 맺어진 대표적 인물인 고홍진은 그의 차남 고상흘이 김만일의 손녀와 결혼하고, 고상흘의 아들 고원은 이익이 제주에서 낳은 아들 이인제의 사위여서 인척이 다시 사돈이 되기도 했다. 고원 부부 입장에서 보면 고원의 어머니는 김만일의 손녀이고, 고원의 장인은 김만일의 외손이어서 증손끼리의 혼인이니 외가쪽으로 6촌간 결혼이다.

이처럼 김만일 집안인 경주김씨, 이익 집안인 경주이씨, 고홍진 집안인 제주고씨는 한 집안으로 엮어지게 됐다. 이익이 유배가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제주에 남아 있던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다시 사제지간과 사돈지간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중심에는 이익의 부인인 경주김씨가 있었다. 또한 이러한 결혼의 형태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에다 혼인으로 맺어진 양가의 결속력을 더욱 다져 제주의 명문가를 만들어 갔다.

이익 후손인 경주이씨 집안에는 산마장 감목관을 세습하게 해준 보답으로 김만일가가 김만일의 외손이자 이익의 후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줬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서귀포 하논 논밭을 비롯해 지금의 서귀포시와 남원읍 일대에 산재한 농토와 임야, 묘터가 그렇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풍수에 능했던 고홍진의 묘는 현재 제주시 해안마을 남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손자 고원과 증손 고만첨의 묘는 서귀포시 남성동에 남아 있다. 모두 원형이 잘 보존돼 조선 중기 제주지역의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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