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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왕족 이건 형제들과 제주여인들(2)
"한이로구나, 저 세상에도 앎이 있다면"
입력 : 2012. 02.20. 00:00:00

▲규창집에 실린 '제주풍토기'는 17세기 제주의 풍토와 풍속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중종 때 제주에 유배와서 사약을 받고 죽은 김정이 남긴 '제주풍토록'과 함께 제주의 풍토를 기록한 문집으로 쌍벽을 이룬다. 규창집 표진 사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낯선 땅·거친 좁쌀밥" 귀양살이 어려움 호소
5형제 중 3형제 제주여인과 혼인 관계 맺어

▲이건이 유배지인 제주도를 배경으로 창작한 유배 한문수필 '규창집' 표지.

인성군이 죽고 그의 부인 해평 윤씨와 다섯 아들, 두 딸은 진도에서 제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이들은 1628년 6월 28일 별도포(화북포구)로 들어와 제주목 객사골과 남성, 가락천 등지에 옮겨 살았다. 그들에게 제주는 너무나 낯선 땅이었다. 이건이 제주풍토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밤낮으로 들리는 파도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거친 좁쌀밥을 먹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장마철 습기로 벽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지네가 기어 다니며 부엌에서는 개구리가 뛰었다.

그들의 죄 또한 심상치 않았다. 부친이 모반죄에 연루돼 죽었기에 왕족으로서의 위엄이나 특권은커녕 감시의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 육지에서의 지원은 물론이고 관아에서도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하지 않았다. 모친인 윤씨는 5남인 길(佶·해평군)과 억(億·해안군), 건(健·해원군), 급(伋·해령군), 희(僖·해양군) 중 세 아들인 길, 억, 급을 제주여인과 짝을 맺어주었다.

윤씨의 이러한 결정은 아들들의 혼기가 찼기도 했지만 더 절실한 이유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함이었고, 제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자손이나마 보려함이었다. 그러나 3남 이건은 형은 물론 동생까지 제주여인과 결혼하는데도 유배가 풀릴 때까지 유독 독신을 고수했다. 자결하라는 왕명을 받지만 자식들에게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라던 아버지 인성군처럼 그는 죄인된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그의 자손들은 왕족 중에서도 예를 가장 잘 지킨 인물로 평을 받는다. 그의 문집 '규창집'에서도 그의 이러한 도인적 풍모를 찾아볼 수 있다.

장남 길이 결혼한 여인의 성씨는 미상이나 둘 사이에 제주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가 후에 상경해 다시 딸 둘을 더 낳았다. 차남 억의 부인은 경주 이씨로 2남을 두었는데 후에 상경해 1남 2녀를 다시 낳아 도합 3남 2녀가 된다. 4남 급은 제주 토호 한대운의 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막내인 희는 당시 8살이어서 혼인하지 않았다. 두 딸 중 막내딸은 제주에 온 지 3년 만인 1631년 윤 11월에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이건은 당시 제주도에 전염병이 퍼져 누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사실을 '제양일록(濟襄日錄)'에 기록하고 있다. "이 고장에 천연두가 항상 있지는 않지만 작은 누이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다. 늘 10년이 지날 때마다 한 번씩 있는데 올해에는 또한 15년이 지나서 처음 있었다. 아마 15년 만에 생겨서인지 오래 끌면서 매우 많은 것 같다. 금년에 마마를 앓는 아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어른들도 또한 많이 앓다가 죽은 자가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시 '누이를 곡하며(哭媒)'를 짓는다. "어제 저녁 너의 병을 걱정했는데/ 오늘 아침 움직이지 못하다니/ 한이로구나/ 저 세상에서도 앎이 있다면/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 걸 응당 생각할 것이지."

왕자들과 결혼한 제주여인들은 경제적 기반이 넉넉한 제주 토호의 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성군 가족은 이 여인들의 집안에 의지해 제주에서 굶어죽지 않고 유배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유배오기 15년 전인 1613년(광해군 5년) 이 땅에는 제주도 최초의 여성 유배인으로 알려진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가 유배 됐다. 그는 왕비를 낳은 귀한 몸이었지만 생계수단으로 막걸리를 팔아 귀양살이의 곤궁함을 견뎌내야 했다. 이건의 어머니는 왕족의 권위를 벗어던지지 않고도 유배생활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략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635년(인조 13년) 9월, 인성군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강원도 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은 1635년 11월 별도포구를 통해 떠나지만 이른바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에서 혼인한 여인들과 자식들은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당시 해령군은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는데 헤어지는 심정을 '아이와 헤어지며(別兒)'라는 시로 읊었다.

형 이건이 이 시에 운자를 따서 지은 시 '동생의 아이와 헤어지며 시에 차운하여(次舍弟別兒韻)'가 남아서 안타까운 이별 장면을 전하고 있다. "멀리 탐라에 유배되었다가 바다로 돌아가며/ 향심(香心)은 몰래 달려가 꿈에도 혼은 날아/ 아이를 두고 떠나는 아비의 심정이 얼마나 아플까/ 참된 충성 하늘에 호소하고 싶어도 알아줄 자 하나 없네."

<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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