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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왕족 이건 형제들과 제주여인들(5)
8년 유배살이 독신 고수… 제주 관찰기 남겨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2. 04.09. 00:00:00

▲유배된 지 8년 만에 석방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건은 존자암과 산방굴사 등 제주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제주인의 생활상을 관찰했다. 그는 제주도를 문장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으로 표현했으며, 징납 폐단으로 탄식하는 백성의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사진은 위로부터 한라산 영실 존자암, 산방산 산방굴사에서 송악산쪽으로 바라본 전경

'제주풍토기'서 학자적 면모·작가적 역량 발휘
제주 떠날 땐 배웅 나온 기녀에게 작별시 건네

이건은 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생활상을 기록한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를 남겼다. 이 문집은 조선시대 제주 실상을 알리는 글로는 중종 때 유배된 김정(1486~1521)이 사약을 받고 죽기 전에 남긴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과 쌍벽을 이룬다. 이건은 또 석방됐다는 전언을 듣고 한라산 존자암과 산방산 등을 유람한 이야기와 이후 조정의 방침이 바뀌어 강원도 양양으로 유배지를 옮긴 후 병자호란을 만나고 그 피난기를 '제양일록(濟襄日錄)'에 서술하기도 했다.

제주풍토기는 제주도 위치와 함께 조류를 이용해 찾아오는 뱃길로 시작해서 탐라개국신화, 신당 등 민간신앙, 기후와 농경상황, 잠녀(潛女)와 제주여인의 풍속, 귤의 종류와 진상, 김만일과 목축상황, 관원들의 횡포, 동식물 현황 등을 망라해 17세기 제주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모든 내용이 직접 관찰하거나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돼 그의 학자적 면모를 보여주며, 때론 감성적인 해설도 덧붙여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건은 뱀 때문에 겪은 어려움과 함께 제주사람들의 뱀 신앙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섬 중에서 두려운 것은 이무기보다 더한 것이 없고, 겨울이나 여름 할 것 없이 곳곳마다 있다. 여름날 풀이 자라 음습할 때는 내실과 집 처마, 상 밑과 자리 아래까지 뚫고 들어오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으니 밤에 캄캄하고 잠에 빠져 있을 때라면, 비록 조심스럽게 피하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으면 이것이 제일 두려운 것이다."

"섬사람이면 말할 것이 없이 이무기를 볼 적마다 신령님이라 하여 반드시 고운 쌀이나 깨끗한 물을 뿌리고 빌며, 절대로 죽이거나 해치지를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걸 죽이면, 반드시 재앙이 생겨 뒷걸음칠 새 없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뱀신앙을 소개하면서도 "내가 8년간 있던 사이에 큰 구렁이를 죽인 게 무려 수백이고, 작은 뱀이라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지만 그런 재앙을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유교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제주 민속신앙은 그의 표현처럼 "망령된 것"이었다.

제주사람들을 문명에 어두운 원주민으로 묘사했지만 수탈의 대상으로 피해를 당하는 백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 제주에서 '테우리'라 일컫는 목자(牧子)들은 진상용으로 기르던 말이 죽게 되면 밭과 농사짓는 소라도 팔아서 갚아야 했고, 그래도 부족하면 솥이며 농기구 같은 물건들까지 내다 팔아야 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말이 죽는 피해가 발생하면 그 친족에게도 징납을 하게 했으니 그는 친족 간 살인사건까지 발생해 목자들이 탄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폐단이 감목관을 겸했던 판관의 소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다. 만약 말이 죽으면 대신 그 가죽을 벗겨서 바치고 고실마(故失馬·폐사하거나 사고로 죽은 말)로 처리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조정이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한 판관이 살아 있는 말만 원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건은 국녹을 먹는 벼슬아치들이 '솔수식인(率獸食人)'한다고 비판했다. '궁안의 주방에는 고기가 있는데, 들에는 굶어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 먹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를 빗대 진상 폐단에 분개했던 것이다.

이건은 형과 동생들이 유배 중 첩을 들이거나 혼인한 것과 달리 독신을 고수한다. 그에게 제주여인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미역을 캐면서 남자와 섞여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마치 남정네가 땔나무를 지듯 모든 물건을 등에 지며, 잠깐 사이에 절구로 몇 섬의 곡식을 찧어내면서도 노래는 구슬프게 부르는 다른 세계의 아낙네들이었다. 그런 그도 제주섬을 떠날 때는 지금의 제주시 화북포구까지 따라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별을 슬퍼하는 기녀를 위해 '조석증가기(祖席贈歌妓·송별연에서 기녀에게 줌)'라는 제목의 짧은 시를 남겨 '헛된' 상상력을 자극한다.

"검은 나귀에 술 싣고 홀로 찾아와/ 다정한 뜻 은근히 나그네 마음 위로하네/ 두 줄기 흘리는 눈물 하 많은 한/ 이별가 한 곡조 천금이네/ 생전에 다만 꽃이 아니었을까/ 떠난 뒤 옥 같은 소리 못 들으리니/ 오늘 나그네의 감회 오로지 사무쳐/ 흰 구름 안갯속 수심 져 읊고 있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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