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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택이 유배가 풀려 떠나고 숨진 지 10년 후 그의 매부 임징하가 유배오자 석례는 그를 찾아가 김춘택의 작품 '별사미인곡'을 부른다. 임징하가 이 일을 '서재집'에 기록해 김춘택의 제주 여인이 석례임이 알려지게 됐다. 사진은 석례와 임징하가 만났던 대정현 감산촌(현 안덕면 감산리) 임징하의 적거터. 임징하 '서재집' 통해 석례 존재 드러나 문학·음악 접목 '별사미인곡' 조명 시급 ![]() ▲김춘택이 제주 유배 중 한글로 지은 가사 '별사미인곡' 그런데도 한갓 변방의 늙은 기녀를 가리키며 "이리하여 나는 오히려 지기를 만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소리가 얼마나 탁월했기에 이런 감탄 어린 고백을 하게 했을까. 조선의 사대부로 하여금 여자와 남자, 귀인과 천인(賤人)이라는 시대가 만들어놓은 틀을 깨게 하고 오직 노래 하나만으로 마음이 통하게 한 그런 친구, 노래로써 당대 최고의 문사로부터 '지기'의 위상을 부여받았던 이 제주여인의 모습은 '별사미인곡' 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보소 저 각시님 서러운 말씀 그만 하오/ 말씀을 들어보니 서러운 줄 다 모르겠소/ 인연인들 한 가지며 이별인들 같을쏜가/ 광한전 백옥경에 임을 모셔 즐기더니/ 어리광이 지나치니 재앙인들 없을쏜가/ 해 다 저문 날에 가는 줄 서러워 마소/ 어떠하다고 한들 내 몸과 견줄 것은 전혀 없네/…… /초나라 가는 허리 연나라 고운 얼굴/ ……/ 대비녀 꽂은 머리 님의 손에 향하였고." 그후 김춘택은 유배가 풀려 떠나 1717년 타계하고 만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후인 1727년(영조 3), 그의 매부인 서재(西齋) 임징하(任徵夏)가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와 대정현 감산촌(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위리안치된다. 이때 한 여인이 그를 찾아오는데 임징하는 유배 중 지은 시문에 이 여인과 김춘택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놨다. "어떤 늙은 기녀가 방문했는데 이름이 석례(石禮)라고 하였다. 그녀에게 찾아온 까닭을 물어보니 아마 백우(伯雨·북헌 김춘택)가 유배 와서 살고 있을 때 정을 두었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바야흐로 국화를 마주하여 홀로 술잔을 들고 있었는데 한 곡조 부르게 했더니 실로 백우가 남긴 '사미인곡'이었다. 느끼는 대로 시를 지었다." 임징하의 기록을 통해서 비로소 김춘택의 지기(知己)였던 여인의 이름이 석례(石禮)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제주성 남문 근처에 살았던 그녀는 김춘택의 매제가 유배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정현 감산촌까지 그 먼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던 것이다. ![]() ▲임징하의 5대손인 임헌대가 훗날 제주목사로 부임해 감산촌에 세운 임징하의 유허비. 임징하의 시는 소리를 하는 여인의 눈에도 술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은 유배객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어른거렸음을 은유한다. "한 곡조 사미인곡이 분명한데/ 외로운 신하와 늙은 기녀 함께 수건 적시네/ 눈썹은 오랜 사이 너무 초췌해 버려/ 말을 들으니 무염녀(無鹽女)가 자신(紫宸)을 모셨구나." 김춘택이 만났을 때 이미 초로의 여인이었던 석례는 '무염녀'에 빗댄 임징하의 표현처럼 이미 죽음을 눈앞에 뒀을 만큼 추한 모습으로 늙어 있었다. 그렇지만 석례는 이 유배객에게 절절한 사연이 남긴 노래로 감동을 안겨 결국 훗날 시 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했다. 기녀인 자신을 지기로 대해줬던 한 남자의 노래를 들려주며 석례는 그렇게 늙어갔다. 김춘택의 '별사미인곡'은 제주에서 유배 중 한글로 만들어진 가사문학 작품이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의 명창 석례에 의해서 그 음률이 다듬어지고 완성되었기에 제주의 향토색이 짙게 반영된 소리(唱), 악곡(樂曲)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김춘택이 "그 대사가 송강(松江) 것에 비하면 더욱 완곡하고, 그 가락은 송강 것에 비하면 더욱 쓰라리다"고 자평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글솜씨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애절한 가락이 더해져 최고의 소리꾼에 의해 불렸기 때문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 유배문학에서 문학과 음악이 접목된 멋진 사례로 한시바삐 이 작품을 조명하고, 창(唱)도 제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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