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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탐라문화의 현재화
입력 : 2012. 06.11. 00:00:00
최근 제주에는 빼어난 경관 못지않게 전통유산인 탐라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꽤 확산되고 있다. 그 예로 탐라문화권, 탐라문화광장, 탐라대전 등을 들 수 있다. 셋 다 특별자치도정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어서 관 주도적인 인식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제주사회에 중요한 문화적인 화두를 제기하는 것이기에 시민사회나 학계에서 관의 일이라고 가벼이 넘길 수는 없다고 본다.

탐라문화광장의 추진에는 애초 의도가 어떠했든 '탐라문화'가 들어있어 논란이 일었다. 정작 확정된 마스터플랜을 보니 탐라문화가 없는 광장 조성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조선시대의 중인문, 삼천서당, 공신정 등 옛 흔적에 대한 고증이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들 유적을 탐라문화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탐라는 이미 고려왕조 때인 1105년에 멸망했는데 말이다.

원래 이 사업은 우근민 지사의 '산지천 야시장' 공약에서 출발했다. 사업의 실행 기획 단계에서 '탐라문화'가 삽입되었는데, 논란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제주도민에게 탐라문화가 무엇인지 성찰하게끔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과연 우리 눈에 남아있는 진정한 탐라유적이 얼마나 있을까. 탐라도성인 무근성은 지명만 남은 채 땅 속에서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탐라의 왕궁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 때까지 존속한 성주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양당, 광정당, 서낭당, 차귀당 등 탐라호국신당 또한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중앙의 관리들에 의해 멸시되다가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에 의해 철폐되어 지금 그 정확한 위치도 파악할 수 없다. 삼을나의 공동체 회의 장소였던 칠성대는 일제 때까지 남아있다가 없어져서 최근 재현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삼성혈은 어떤가. 정조 10년(1786) 제주목사 이명준이 올린 장계에는 지금의 삼성혈은 원래 광양당이었는데, 중종 21년(1526) 이수동 목사가 삼을나의 자손들에게 제향을 올리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삼을나의 탐라 건국을 기리고 호국을 기원하는 광양당의 무속적인 국가제례가 유교적으로 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삼성혈은 탐라 망국의 상징이 되어버린 셈이다. 삼성신화는 탐라개국신화 또는 을나신화로 자리잡지 못하고 세 가문의 소유로 남아버리게 되었다. 1983년 문을 연 삼성초등학교의 명칭이 삼성(三聖)인 것은 그나마 삼성(三姓)에서 벗어난 올바른 작명이라고 보인다.

이렇듯 탐라문화의 형체는 1105년 멸망 이후 9백년 간 철저하게 파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욱이 섬나라 탐라를 계승한 지방 제주의 주민들이 오랜 세월을 지내며 탐라에 대한 기억조차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36년 간 일제 통치하에서도 문화적인 정체성을 혼동한 반민족 지식인들이 횡행했던 것을 감안하면 섬에 존재했던 나라를 1천 년 동안 누가 기억해 낼 것인가.

그러나 역사는 지배자의 문헌으로만 존속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민초들의 역동적인 기억과 구술 전승을 통해 그 알맹이가 후세들에게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다. 풍부한 탐라의 신화와 전설은 탐라를 무너뜨리고 기억에서 지우려고 했던 중앙지배층의 시도에 처절하게 저항하며 심방들의 주술과 본풀이, 민중들의 구비전승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땅 속에 묻혀있는 탐라의 유구와 유적은 앞으로 고고학 전문가의 체계적인 발굴과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탐라문화' 담론을 주도하는 쪽은 특별자치도 집행부이며 시민사회나 학계보다 더 적극적이다. 시민사회가 해군기지를 둘러싼 평화 담론에 적극 나선 반면 문화의 대중화에는 남은 역량을 쏟기 힘든 게 현실이다. 예총이나 민예총 또는 문화예술재단이 존재하지만 무관심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진정 탐라문화의 현재화에 주력해야 할 주체는 시민사회이며 전문적인 문화운동 집단이어야 할 것이다. 행정이 주도하는 문화적 이슈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끔 탐라문화의 의미를 현재화하는 데 적극 나설 때가 지금이라고 하겠다.

<박찬식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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