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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조정철과 홍윤애(3)
사랑 위해 죽음 택한 홍윤애의 순애보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2. 06.25. 00:00:00

▲조정철을 살리려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자신은 죽음을 선택한 홍윤애의 묘지. 조정철은 훗날 제주목사로 부임해 홍윤애의 묘를 단장했으며, 지금도 그가 짓고 쓴 묘비가 전해져 유배문학 연구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시구 목사 부임 후 유배생활 더욱 험난
거짓 자백 강요·모진 고문 앞에서도 당당

제주목사 김영수는 청렴 공정해 당시 제주도민으로부터 추앙받은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재임 중 각 목장에서 소와 말이 분실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산장 경계에 담장을 쌓아 말을 기르는 데 편의를 주고, 홍수로 산지천이 범람해 민가가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잇따르자 성을 쌓아 방지했으며, 화북천에는 보를 쌓아 수해에 대비하기도 했다. 무인이었던 그는 문인의 풍모도 지녀 관덕정과 방선문에 현재 그의 글이 남아 있으며, 제주뿐만 아니라 통영과 포항, 여수에도 사적비와 선정비가 세워져 사후에는 청백리로 천거되기도 했다.

▲홍윤애 묘비 뒷면 탁본

김영수가 조정철을 박해한 것은 당시 정국과 함께 여느 유배객과는 다른 그의 상황을 고려해야 이해할 수 있다. 정조 시해음모사건을 일으킨 세력은 노론 벽파의 대표적 가문인 홍계희 집안이다. 홍계희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 홍지해는 조카 홍상범과 함께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켜 정조를 시해하려 했던 초유의 사건을 일으켰다. 조정철의 아내 남양홍씨는 바로 홍지해의 딸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영조를 왕이 되게 한 노론 4대신이어서 사형을 면한 대신 유배형에 처한 것이 조정철의 불행 중 다행이라면 처가 식구들이 시해 주모자들이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도 가혹한 감시와 압박을 피할 수 없었던 것 역시 그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정조는 김영수를 제주목사로 내려보내면서 특별히 세 가지 일에 전념해줄 것을 하교하고, 김영수는 "직접 성교(聖敎·책봉할 때에 내리던 임금의 교명)를 받았으니 각별히 다스리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하교는 제주목사로서 집중해야 할 원칙을 언급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조정철의 유배생활을 더욱 어렵게 했다.

"제주는 바다 밖에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조정의 명령이 이르지 않는 곳이고, 풍속이 우둔하여 아마 반드시 교화하기 힘들며, 백성의 폐막(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매우 커서 구제하고 혁파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려가거든 잘 혁신하고 개혁하여 실효가 나기를 기대한다. 유배죄인이 이곳에는 가장 많은데 해이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또한 엄하게 더욱 사찰하도록 하고, 장사꾼과 잡인들의 출입을 각별히 금지해 잡도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승정원일기 정조 2년 11월 27일)

피비린내 나는 정국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절해고도에 유배된 조정철의 불행은 계속됐다. 김영수의 후임으로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해온 것이다. 정조는 그가 제주목사로 발령나 하직인사를 올리자 활과 피리 등을 선물할 만큼 총애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영조 때 과거에 급제한 그에 대해 문필에 능했지만 몸가짐이 비루해 평판이 나쁘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는 조정철 집안과는 당파가 서로 달라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기도 했다.

"김시구가 도임한 후부터 김일경의 손자를 초빙했는데, 종성(함경북도)에서 대정으로 유배된 이름이 거정이란 자로 관아 속에 머물러 두고 있다. 그것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확실함을 알 수 있다." 조정철은 김시구의 고문으로 홍윤애가 죽고 난 이후 어사가 와서 심문할 때 "사충(노론 4대신)의 후손을 무고로 해쳐 반드시 죽이기를 기약함은 바로 그의 평상의 뜻"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김일경은 경종 때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한 뒤 노론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로 당시 조정철의 증조부 조태채도 진도 유배 중 사사됐다. 김시구는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정철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려고 했으며, 그 과정에서 홍윤애는 관아에 끌려가 처참한 고문을 당하면서 거짓자백을 강요받는다. 조정철이 임금과 조정 중신들을 저주하고, 다른 유배인들과 자주 서찰을 교환하면서 접촉했으며, 자신과의 관계를 자백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김시구 목사는 얕봤던 제주여인의 당당한 태도에 당황했다. 사력을 다한 홍윤애의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건 목사였다. 고문은 한층 더 극한으로 치달았다. 몽둥이가 약해서 자백이 신통치 않은 거라며 윤노리나무 몽둥이를 깎아 매우 치게 했다. 윤노리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피부를 뚫고 뼛속을 파고들 만큼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는 끝내 홍윤애로부터 자백 한 마디 얻어내지 못한 채 죽이고 말았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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