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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조정철과 홍윤애(5)
목사로 돌아와 무덤에 바친 추모詩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2. 07.09. 00:00:00

▲유배가 풀린 후 관직에 오른 조정철은 환갑의 나이에 제주 목사로 자진 부임해 홍윤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찾아내 아낌없는 부정을 쏟아낸다. 조정철은 딸과 사위 박수영을 족보에도 올려놓았으며,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이어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기도 했다.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
홍윤애 영혼 위로·딸 찾아내 도와주기도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는 의녀 홍윤애의 묘가 있다. 원래 제주시 도심 한복판 전농로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제주농업학교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최근 들어 이 무덤에 세워져 있는 화강암 비석의 비문을 읽기 위해 조선 시대의 유배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국문학사상 빼어난 작품들이 유배지에서 쓰여 우리 국문학사에서 유배문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철의 '사미인곡', 김만중의 '구운몽', 김춘택의 '별사미인곡'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제주도는 조선 시대 최악의 형벌지로서 유배인 중에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많았다. 이들이 제주를 소재로 해서 남긴 주옥같은 작품 중에는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 동계 정온의 '제주위리기', 북헌 김춘택의 '수해록', 정헌 조정철의 '영해처감록'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영해처감록'은 조정철이 제주 유배 기간에 쓴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감귤에 관한 12편의 시를 비롯해 홍윤애의 죽음에 대한 통한의 피눈물을 읊은 시도 들어있다. 홍윤애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추모시가 그것으로 이 시문집에서 가장 비통한 작품이라 하겠다.



묻힌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

누가 그대의 억울함을 하늘에 호소하리.

황천길 아득한데 누굴 믿고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천고에 아름다운 이름들 형두꽃처럼 빛나며

한집안의 두 개의 절개, 자매가 현숙하여라.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는 일으킬 길 없고

푸른 풀만이 말갈기 앞에 돋아나는구나.



조정철은 29년의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관직에 등용되자 1811년(순조 11)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를 자원하고 부임한 뒤에는 생명의 은인인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조선 시대를 총망라해서 목사 신분의 사대부가 한 여인의 무덤에 찾아가 통곡을 하고 추모시를 써서 비석(碑石)을 세운 예는 오로지 이것이 유일하다. 하여 홍윤애 묘의 묘비명은 유배문학의 꽃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라 불리는 백호 임제가 평양에 벼슬 살러 가는 길에 개성의 황진이 무덤에 들러 술 한 잔을 올리고 시 한 수를 읊은 일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로 임지인 평양에 닿기도 전에 파직당한다. 가히 혁명사상을 꿈꾸며 거침없이 글을 썼던 허균도 우정을 나누던 전라도 부안의 기생 매창(梅窓)의 부음을 듣고 애도시를 보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갔던 그는 조정이 떠들썩하도록 곤욕을 치러야 했으며 결국 정적들로부터 탄핵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대가 규정한 제약을 무릅쓰고 제주목사 조정철은 홍윤애를 '의녀(義女)'라 존칭하며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의 추도문을 찬하고 추모시를 지어 위령제를 지내고 비석을 세운 것이다. 또한 홍윤애가 낳아서 언니 품에 안겨 애월읍 산새미오름의 절간으로 피신했던 딸과의 감격스러운 상봉도 이뤄졌다. 조정철은 딸과 사위를 호적에 올렸으며 제주목사로 있던 일 년 동안의 봉급을 모두 딸을 위해 사용했다. 딸이 시집간 애월읍 곽지리에 세 칸 초가집을 지어줬으며 초승달처럼 자그마하나마 밭들도 네 차례에 걸쳐 사줘 생계 걱정을 면하게 해주는 등 아낌없이 부정(父情)을 쏟았다.

파격적인 그의 행보는 제주도민에게는 물론이요 조정과 사대부들에게도 알려졌을 테지만 그 행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제나 허균과는 달리 일 년 만에 안동부사로 승진해 제주를 떠났다.

1997년 11월 9일,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조정철 일가인 양주조씨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에서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초헌관은 양주조씨대종회 조원환 회장, 아헌관은 홍윤애의 외손 박용진 씨, 종헌관은 조정철과 홍윤애의 애화를 세상에 처음으로 밝혀낸 당시 제주문화원 홍순만 원장이었다. 이 행사는 실로 홍윤애가 비명에 간 지 186년 만에 이뤄진 복권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그 의미가 깊다.

홍윤애는 김시구 목사가 유배인 조정철이 저지르지도 않은 혐의를 걸어 제거하려는 음모를 갈파하고, 고문과 회유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충분히 살아날 수 있었지만 잡혀가기 전 "공의 삶은 나의 죽음에 있다"며 자신이 못다 한 삶까지 살아줄 것을 신신당부한 뒤 목숨까지 내놓았다. 이것은 한 여인의 순애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주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기질을 널리 선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홍윤애의 고결한 정신과 순정한 사랑은 제주여성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제주여성사에 빛나는 금자탑으로 조명돼 마땅하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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