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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박영효와 과수원댁(3)
비밀에 싸인 독짓골 과수원댁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2. 07.30. 00:00:00

▲박영효는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간 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조천의 김희주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인연을 이어간다. 박영효가 사망하기 1년 전 보낸 이 편지는 일본 망명 당시 글 값으로 먹고살았을 만큼 뛰어난 그의 한문 초서체의 진수를 보여준다.

제주군수 지낸 조천 김희주 집 머물다 독짓골 옮겨
유배 풀린 뒤 보내온 한문 초서체 친필 편지 전해져

박영효가 제주에 온 것은 1907년 8월 27일,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처음에 그는 조천리(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김희주(金熙胄·1854~1937)의 집에 머물렀다. 박영효는 사헌부 감찰과 강원도 평창군수를 지내며 개화사상가들하고도 어울려 연줄이 닿았던 제주 출신의 김희주 집을 적거지로 선택했던 것이다. 지금도 조천에는 이 집이 원형 그대로 남아 박영효가 기거했던 사랑채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박영효가 거쳐간 이곳에 4년 후인 1911년 5월 남강 이승훈이 유배돼 머문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제주도 유배인인 그는 제주도 유배역사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다. 오산학교를 설립한 그는 훗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로 참여하기도 한다. 박영효가 김희주 집 사랑채에 머물렀던 데 반해 그는 노복이 거처하던 건물에서 생활한다. 지난 1990년 10월 남강문화재단과 제주도사연구회가 공동으로 '남강 이승훈 선생 유배처' 동판을 제작해 이 건물 벽에 부착해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김희주는 왕의 부마인 박영효가 자신의 집에 머물게 되자 극진히 대접했다. 김희주 후손들에게는 유배지에서도 군자의 풍모를 유지해 대감이라 불렸던 박영효의 이야기와 함께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희주가 식사 때마다 큰 행기(놋쇠로 만든 그릇)에 밥을 가득 담아 먹던 대식가였던 데 반해 박영효는 소식을 했던 모습도 김희주 식구들에게는 생경했다.

▲무관으로 평창군수와 제주군수, 정의군수 등을 지낸 김희주. 서울에 갔다가 박영효의 소개로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런 박영효를 위해 김희주 부인은 갈치와 옥돔, 볼락 등 생선을 따로 준비해 차롱(대나무로 짠 바구니)에 넣어 말렸다가 식사 때마다 내놓았다. 이어 제주성 남쪽 독짓골(현 제주시 구남동 이도주공아파트 일대)로 유배지를 옮길 때에는 노비와 함께 조랑말을 내주었으며, 반찬을 싸서 보내기도 했다. 박영효는 이렇게 도움을 준 김희주를 위해 김희주의 아들 서울 유학을 주선해준다.

김희주 집안에는 훗날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간 박영효가 김희주와 김희주의 자손에게 보낸 편지 세 통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 망명 당시 글 값으로 먹고살았을 만큼 뛰어난 서화가였던 그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편지들이다. 그중에서 정의현감에 재임 중이던 김희주의 인사 청탁을 정중히 거절하는 첫 편지는 그의 심성을 잘 보여준다.

"말씀하신 뜻은 낱낱이 알겠습니다. 그러나 관청의 일이란 스스로 정해진 규칙이 있어서, 비록 담당 관리라 해도 일을 제멋대로 처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관리가 제멋대로 처단할 수 없는 것이니 어떻게 일을 부탁할 수 없는 것인즉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귀하의 일에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특히 형편이 이상과 같기 때문에 이해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두 번째 편지는 봉투는 친필이지만 내용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대필한 것이다. 그는 편지에 노쇠해져서 정신이 혼미한데다 손을 떨어 먹 가는 일을 그만 둔 지 오래라고 밝혔다. 세 번째 편지는 김희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김희주의 손자에게 보낸 문상편지다.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써내려간 한문 초서체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이 편지는 박영효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38년 1월 18일에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

"선대인(先大人·남의 죽은 아버지에 대한 경칭)의 장사 지낸 일이 꿈에 생각 밖에 나타나서 놀라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는데, 장애례(葬哀禮)를 모시면서 어떻게 구구하게 견디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부를 받들고 있는 영효는 벼슬길에 나서서 어쩔 수 없이 소(疏·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의 글 또는 그 회답 편지)로 문상을 대신하게 되니, 이에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절애순변(節哀順變·슬픔을 절제하고 변화에 순응함·상중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할 때 쓰는 말)하기를 이렇게 바랄 뿐입니다."

박영효가 조천 생활 석 달 만에 거처를 마련하고 유배지를 옮긴 것은 제주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고 정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중앙정계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풍광이 아름답고 인심도 좋은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 먹었음 직하다. 실제로 그는 유배가 풀려도 한참이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름과 성씨가 알려지지 않은 제주여인을 얻어 살았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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