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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8·15의 기억
입력 : 2012. 08.13. 00:00:00
올해로 8·15 광복 67주년을 맞는다. 1945년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최후 교전국이었던 일본이 패전한 날이지만 그 명칭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달리 나타났다. 침략국 일본은 '패전'이란 용어 대신 '종전'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다.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사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였고, 1949년 10월 1일 공식기념일 명칭으로 국권 회복 사실을 강조한 '광복절'을 지정했다. 일제의 부분 점령 상태였던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일투쟁의 결과로써 '승전'임을 내세우고 있다.

8·15 이후 동아시아 삼국의 행로 또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설정되어 갔다. 한국은 1948년 같은 날 남한 정부 수립,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을 통해 독립과 분단의 양면성을 띤 국가가 건설되어 2년 뒤 두 체제 간 전쟁이 발발하였다. 중국은 국공(國共)내전이 발발하여 1949년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졌고 곧바로 한국전쟁에 북한을 지원해 참전했다. 일본은 7년 간 미국의 군정 통치를 받다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새로운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8·15의 결과는 전범국 독일을 양단시켜 놓았던 유럽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식민지로 치욕과 고통을 겪은 한반도가 일본을 대신해 미·소에 의해 분단되었고, 전범국 일본은 미국의 우산 아래 철저하게 친미화된 나라로 거듭났다. 더욱이 한국전쟁 와중에 일본은 군수산업을 동력으로 경제 부흥을 이루어내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중국은 생각지도 않은 사회주의 단일 체제를 대륙 안에 이뤄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무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국가적 관점에서 잠깐 벗어나서 제주도는 8·15을 어떻게 맞이하였을까 궁금해진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부속도서라는 법리적 관점 말고 제주도민이 처한 자기생존의 관점과 더불어 동아시아 삼국에 에워싸인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8·15 직전까지 제주도에는 7만 명의 최후결전을 위한 일본군 병력이 주둔했음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7만 병력의 철수는 제주도민의 생존을 위한 '진정한 해방'이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의 공격 과정에서 일본 본국의 강압에 의해 옥쇄(玉碎)작전으로 사망한 오키나와 원주민이 12만여 명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제주도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일본군의 존재는 다가올 재앙의 씨앗이었다.

8·15는 제주도민에게 대재앙 위기로부터 해방임과 더불어 새로운 기회의 전환점이었다. 식민지 백성으로 객지 일본에서 생계를 꾸려가던 6만 명 가까운 귀환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노동인구의 증가는 대량 실업 사태를 가져왔고 미군정 당국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원활하던 제주도와 일본 사이의 물물교류 식민지 네트워크가 미군정 시기에 단절됨으로써 제주도 경제는 열악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미국은 오키나와와 더불어 제주도를 전략적 군사기지로 주목하였고, 한반도의 분단은 제주도를 이념대립의 각축장으로 만들게 하였다. 결국 4·3의 원주민 대량희생으로 가는 과정에서 제주도는 세계냉전과 한반도 분단의 축도(縮圖)가 되고 말았다.

8·15를 다시 맞으며 국가의 독립에 못지않은 지역의 자치 지향을 내걸어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선배들의 현대사를 돌이켜봄은 미래의 제주도를 전망하기 위한 역사적 성찰의 태도라고 하겠다.

<박찬식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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