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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5·끝)
난리의 징후… 민란에 앞장선 제주 여인들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2. 09.24. 00:00:00

▲한말 최고의 문장가이자 개혁과 개화에 앞장서며 진보적인 삶을 살았던 김윤식은 묘비에 관직을 새겨 넣지 않도록 했다.

이재수란 발발·경위 전 과정 기록 사료가치 높아
최근 학계서 진보적 삶·학문적 업적 재조명 작업

유배인들이 호의호식했을 정도라면 이들에 대한 관리 책임을 지닌 제주목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목사 박용원 역시 '조운(朝雲)'이라는 이름의 애첩에게서 아들을 얻는다. 김윤식의 기록에 따르면 심지어 이재수란이 발발해 곳곳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제주군수는 해가 낮이 되도록 기녀를 끼고 누워 있다가 대정군수 채구석의 핀잔을 듣고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이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짤 때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유배인 신분이긴 했으나 당대를 풍미했던 정치인들이 변방 제주에서 현직 목사와 경쟁이나 하듯이 온갖 풍류를 구사하며 탕진하던 이때 큰 변란이 발발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변란이 터지기 전에는 곳곳에서 그 징후가 나타난다. 김윤식의 일기를 보면 이재수란이 발발하기 전 해인 1899년 정초부터 제주성 안팎에서 광견병에 걸린 개들이 출몰했다. "성 안에는 세초(歲初)부터 개들이 서로 잡아먹는 변이 있었는데 점점 더 미친개가 되어 사람을 함부로 물어뜯으니 길가에는 아주 위험했다." 미친 것은 개뿐만이 아니었다. 미친 소가 날뛰다 총에 맞아 죽고, 또 어떤 미친 말은 소와 말을 물어뜯다 저절로 죽었으며, 어느 고양이는 자기 꼬리와 네 발을 물어뜯었다. 관덕정 앞에 선 돼지시장에는 머리에 꼬리가 돋아난 새끼돼지가 출현했으며, 죽성(竹城·제주시 오등동) 민가에서는 알에서 나온 지 사흘 된 병아리가 날개를 치며 길게 '꼬끼오~'하고 울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제주목사는 3일 안에 성 안의 개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무대신으로 한말 각종 국제 조약을 이끌었던 김윤식은 뜻하지 않게 유배지에서 이재수의 난을 목격하고 속음청사에 이를 기록한다. 이 사료가 발굴되기 전 이재수난은 제주도 향토사학자들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김윤식의 기록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 발생 경위와 전 과정을 기술해 이재수란 연구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그리고 난이 끝나자 정부는 유배인들이 민란에 개입했다며 제주에 있던 유배인들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 67세의 김윤식도 이 때 전라남도 지도(智島)로 이배돼 3년 6개월간의 제주 유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김윤식은 제주 여인들에 대해 웬만한 남자들은 가까이하길 두려워할 만큼 모질고 독한 사람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재수란을 직접 목겼했기에 그런 생각은 더욱 굳혀졌다. 이재수란 발발 당시 천주교도들이 강력한 화력을 믿고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에 저항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천주교도들을 제압해 민군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줬던 이들이 바로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윤식이 제주 여인들에 대해 "본디 악하고 사나워 싸우기를 좋아하여 남자들도 두들겨 패는 사람들이었다"거나 "이 고장 여풍은 참으로 몹시 사납다"고 했던 것은 일견 바로 본 듯하지만 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놓친 해석이기도 하다.

이재수란에 대한 그의 기록 역시 난의 발발 및 전개 과정을 서술한 유일무이한 문서로 사료적 가치를 지니면서도 지배층의 시선에서 바라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말 외무대신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했던 김윤식은 1886년 6월, 프랑스 성직자들의 선교활동을 자유롭게 한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서 비롯된 이재수란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이 조약을 체결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똑같은 난을 목격해놓고도 제주의 향토사학자들이 이재수를 영웅호걸로 기억하는 것에 반해 그는 어리석고 우둔한데다 잔혹한 인물로 묘사했다.

사실 김윤식은 상당히 진보적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가 과부의 재혼을 금지한 과부재가금지법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됐지만 이는 선언에 불과해 1950년대까지도 과부는 재혼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과부재가금지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서자가 대통을 잇지 못하게 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죽기 1년 전인 87세의 나이에 아들과 손자를 각각 중국과 일본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도 있었다.

한말 최고의 문장가였던 그는 영선사로 중국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습득하고 민생 안정과 군비 증강을 역설했다. 외부대신을 지내면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개화와 개혁에도 몰두해 유교를 기반으로 개혁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교육은 구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현대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학계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연구하고 삶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진행돼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끝>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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