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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광장]오래된 미래
입력 : 2012. 10.16. 00:00:00
가끔 타지의 친구들이 제주에서 명승지나 텅 빈 전통마을을 제외하고 현지인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시청 앞이나 칠성통 일대, 제원 아파트 앞이 제주의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긴 하지만 찾아오겠다는 이들에게 소개해주기에는 변변찮은 면들이 많다. 시청 일대는 말 그대로 '유흥가'일 뿐이고, 칠성통은 탐라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지만 그 유구함과 단절된 채 대형 브랜드들의 영토가 되어있으며, 제원아파트 앞은 나름 '신화의 거리'라고 내세우며 공공디자인에 힘쓰고 있지만 대체 신화의 거리라는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차라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명칭인 '바오젠 거리'가 더 제원 아파트 앞의 테마와 맞닿아 있다) 근본은 신제주에 있는, 시청 앞과 칠성통 일대의 '짬뽕'일 뿐이다.

그러나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시로 들어오면, 이중섭 거리를 자랑스럽게 추천할 수 있다. 이중섭 미술관에서 에둘러 가지 않고 핵심을 향해 곧바로 달려가는 이중섭의 작품들을 볼 수 있고, 미술관을 나와서는 예쁜 카페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가끔은 공방에 들러 핸드메이드 악세사리 등을 쇼핑할 수 있으며, 조그만 표지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면 겉치레 없이 소박한 제주민속신앙을 느껴볼 수 있는 서귀포 본향당도 있다. 하수구의 뚜껑처럼 사소한 거리의 구조물에까지도 이중섭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으니 공공디자인이 주는 즐거움 또한 만끽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점들(비좁은 주차장, 완전한 '보행자의 거리'가 아닌 점, 왜 설치했는지 모를 텅 빈 게시판, 특히나 가로등 위에 설치된 이중섭 그림을 형상화한 철골 구조물의 엉성함 등등)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그런 투박함 마저도 이 거리의 매력인 듯 싶을 정도로 이중섭 거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이중섭 거리를 둘러보다 기분이 심심해질 쯤엔 길 건너의 매일올레시장으로 간다. 그곳은 전통시장이면서도 아케이드와 보도 가운데에 물길과 분수를 설치해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렇듯 이중섭 거리와 매일올레시장 일대는 현지 시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도심의 역할을 맡으면서, 올레길 코스가 지나가는 관광지로서의 역할도 맡고 있다. 게다가 이중섭이라는 독특한 아이콘을 잘 이용해 새로운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간 또한 맡고 있다. 이 일대는 일상생활공간으로서의 제주와 관광지로서의 제주로 양분된 현재 제주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그 괴리감을 문화적으로 표출해냄으로써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중섭 거리와 매일올레시장을 걷고 있다보면 제주의 미래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일상의 찌든 때가 곳곳에 묻어있으면서도 그것을 독특한 문화로 승화시켜 일상을 좀 더 다채롭고 즐겁게 만드는 것, 그것이 화가 이중섭의 작품세계이고, 다수가 관광지로 여기며 찾아오는 제주를 생활터전으로 삼고 있는 소수인 우리 자신이 나아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칠성통 일대의 재개발은 과거로의 회귀를 보는 듯하다. 칠성통 일대는 탐라국의 기원이 깃든 곳이고 근대까지 제주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미 충분한 소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도로 포장을 다시 하고 공원을 조성하고 광장 몇 개 뚫어놓는 식이라면 그것은 재정비라기 보다는 그곳을 다시 해치는 일이 될 것이다. <양은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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