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n라이프
의무와 금기 규정한 역주의 원리
이창익의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3. 03.22. 00:00:00
현대인의 일상은 시분초로 촘촘히 짜여 있고, 매달 그리고 매년에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기념일과 명절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근대적 시간체계에 매여 살았을까? 근대적 시간체계가 도입되기 전의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살았을며 그 시간은 어떻게 구성됐을까? 사람들의 일상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현대의 달력은 시간의 측정과 기록, 체계화를 통해 인간의 일상활동을 규제하고 구조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지표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통 역서는 일상의 조직이 아니라 주술-종교적 생활을 위한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통 역서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역주(曆註)다. 역주는 매일의 날짜에 그날 해서 마땅하거나 하지 않아야 할 행위들을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중대사를 앞두고 길흉을 따지거나 택일·택방(擇方)하는 데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달력은 관혼상제의 대사뿐만 아니라 이발과 손발톱 깎기, 남의 집 방문이나 병원 가기, 사냥·청소·집 수리 같은 크고작은 온갖 행위에 대해 의무와 금기를 규정하는 역주들로 빽빽하다. 현대의 달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상세하고 엄밀하게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고 통제했다. 이런 긍정과 부정의 금기 가운데 어떤 것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고정된 날짜를 배당받아 세시의례로 자리 잡았고, 날짜를 배당받지 못한 의례들은 소멸해갔다.

이창익의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는 달력의 역주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전통 역서의 중심은 매일의 날짜에 일상의 모든 활동을 적합(宜)과 부적합(不宜)으로 규정해 기입한 역주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간의 역서 연구는 대부분 역법에 초점을 맞추거나 역서의 역사만을 다뤄왔다. 역주가 가진 주술-종교적 의미와 그것이 기반한 점성학적 우주론 때문에 역주를 미신이라 여겨 과학적 연구대상에서 배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주의 의미를 살피고 역서의 구조를 분석해 세시의례와의 연관성을 논의한 것은 이 책의 분명한 차별성과 독자성을 보여준다.

역서와 세시의례는 인간행위를 우주론적 순환질서의 맥락에 자리 잡게 해 인간의 행위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다. 이 책은 역주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역주의 기능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시공간을 살아온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창익 지음. 창비.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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