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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병윤 화백의 시사만화 '황우럭'이 4월15일자로 10093회를 맞았다. 우리나라에서 일간지 시사만화 1만회를 넘긴 사례는 1만4000여회의 연재 기록을 남긴 김성환 원로화백의 '고바우 영감'이 유일(唯一)했다. 그리고 이제 '황우럭'이 1만회 고지를 돌파하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양병윤 화백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고바우'가 시사만화에 국한됐던데 비해, 4컷 짜리 황우럭과 1컷 짜리 만평을 동시에 연재했다는 점이다. 이를 반증하듯 김성환 화백조차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기적같은 현상으로, 진정 독보적(獨步的)인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고 격찬했다. 지난 12일 라마다 프라자 제주호텔에서 열린 '황우럭' 연재 1만회 기념 작품집 출판기념회는 양병윤 화백의 업적과 노고를 기리는 장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제주언론인클럽 이문교 회장은 양 화백의 삶을 "히말라야 14좌 등정과 같이 고달픈 길이었다"고 위무했다. 이어 "이번 작품집은 시사만화의 경계를 넘어 한 시대 사회풍자의 상징적인 문화콘텐츠이자 귀중한 언론사료로 높이 평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도 한 몫 거들었다. 그는 "양 화백과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무엇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내뿜는 풍모가 마음을 끌었다"고 고백(?)했다. 뻑시게 생긴 그의 큰 두상과 부리부리하게 큰 두 눈 등이 제주사람들에게 친근한 '돌 트멍의 우럭'과 영락없이 닮았다는 것. 등지느러미에 솟아있는 억센 가시 등으로 무장된, 그러나 그 바탕에 내재된 해학과 위트와 풍자로 세상과 맞서온 게 '황우럭'의 모습이라고 그는 평했다. 여기에 고갈될 줄 모르는 예술적 상상력이 가미되었기에 시사만화 1만회 돌파라는 쾌거(快擧)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8년 5월부터 '황우럭' 연재가 시작됐으니 벌써 4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스물 다섯이었던 청년은 이제 일흔의 문턱에 선 초로의 노인이 되었다. 반세기를 아우르는 동안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황우럭'과 만평(漫評)은 날마다 태어나고 진화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 '황우럭'이 갖고 있는 생명력의 원천(源泉)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황우럭'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선량한 소시민이다. 다소 어리숙하지만 할 말은 하고 마는 용기도 있다. 온갖 즐거움과 고난을 서민들과 더불어 했다. 우럭의 등가시와 같은 날카로움으로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전적으로 양병윤 화백의 인간적인 면모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행운을 얻었다. 곁에서 지켜본 양 화백은 무엇보다 화통하면서도 소탈했다. 일흔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회 부조리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할 줄도 안다. 술 실력도 여전해 애주가를 넘어 대주가 수준이다. 즐겨 부르는 애창곡은 잘 알려진 '봄날은 간다'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양 화백의 봄날은 아직 가지 않았다. 현기영 선생의 말처럼 '황우럭'이 나이를 먹지 않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양병윤 화백은 "황우럭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40여년을 이어온 원동력"이라며 "붓의 힘이 남아있는 동안 세상과 계속 만나겠다"고 다짐한다. '황우럭'의 건승과 끊임없는 정진(精進)을 빌며 빠른 시일내 '번지없는 주막'에서의 조우를 기대한다. <논설실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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