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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노 세이기치가 그린 제주의 왕성(王城). 제주사람들에게 들은 탐라 이야기와 당시 제주성의 모습을 토대로 옛 탐라왕성을 재현한 뒤 '왕성'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무근성'이라 불리는 지명과 연계해 감상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제주거주 日人 다케노 그림 16점 남겨 제주성·관아 등 옛 풍경 사실적 묘사 사료가치 높아 한라일보 창간 24주년을 맞아 '제주미학산책'이란 기획연재를 시작하게 된 점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 우선 본 연재글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지난 2011년부터 제주전통문화연구소는 일제강점기 제주도에 거주했던 일본인 가계를 중심으로 당시 제주풍경을 담은 수집사업(제주특별자치도 민간위탁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2012년 말 본 사업을 완료했고, 최근에 그 성과물을 정리한 사진자료 수집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이 사업의 추진배경은 최근 여러 해에 걸쳐 제주시 원도심의 탐라문화권 정립사업, 제주성 복원 등에 대한 사회·문화담론이 형성되고 있으나, 일제강점기 전후의 제주도 원형을 간직한 시각자료의 절실한 필요성은 물론, 현재 일본 내 수집 대상 그룹들(제주거주 일본인들의 후손들) 역시 고령화되어 소장자료의 망실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일제강점기 제주성 잔재를 비롯하여 제주성내의 중요 건축물, 돌하르방, 도내 항구 및 포구 풍경, 농촌풍경, 목축풍경, 해녀 등을 담은 총 903점의 시각자료(사진·지도·엽서·잡지·논문 등에 실린 이미지 등 포함)를 입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수집 성과물 중에서 본 사업의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했던 필자는 일본인 다케노 신이치(竹野新一·1930년생·현 오카야마현 거주)씨가 제공한 100년 전 제주풍경 그림 16점에 주목, 그 속에 담긴 옛 제주의 성터, 건축유적, 자연, 명승지 등의 과거와 오늘날의 의의를 모색하면서, 그 풍경에 담긴 제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개인적인 아련한 기억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찾아 나서려 한다. ![]() ▲다케노 세이기치가 제주성의 주요 지점을 표시한 도면.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다케노 세이기치(竹野淸吉·1902~1986·그림 소장자 신이치 씨의 부친)라는 일본인이다. 그는 조선의 국권침탈 후 일본인이 공무 또는 상업으로, 또는 조사 등으로 조선 땅을 본격적으로 밟기 시작할 무렵인 1912년에 양(養)부모와 함께 내도하여 제주성내에 1942년까지 살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0세. 그는 제주성내 유일한 일본인 학교인 제주공립심상소학교(현 남초등학교)에 전학하여 1914년에 졸업한다(제6회 졸업생). 1920년대 성인이 되면서는 (주)제주통운이라는 자동차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한편, 그의 부친(1872년생)은 제주성내에 정착하면서 밭에서 현지인을 고용하여 목화 재배를 했고, 나중에는 채소 등을 재배하여 본인의 가게(다케노 상점)에서 팔았다. 모친은 일본식으로 머리를 말아 올려주는 미용업과 손수레로 야채 행상 등을 하면서 부친을 도왔다. 신이치씨에 의하면 할머니(세이기치의 모)는 제주 방언을 구사할 수 있어서 현지 사람들과도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케노가(家)의 경우는 3대가 제주에 산셈이다. 그것도 국권침탈 직후부터 태평양전쟁이 한창 벌어지는 역사적 격동기에 말이다. 다케노 세이기치로선 10대에서 40대까지 제주성내에 살았던 셈이다. 그것도 개인의 인생을 통틀어 경험과 기억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그런 개인적 애증에서인지 세이기치는 귀국 후 4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유년기와 청·장년기를 송두리째 보낸 '제주'라는 자신의 삶의 현장을 아련히 기억하며 그것을 그림으로나마 달랬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후 이 그림들을 아들 신이치씨가 집 한쪽에 둘둘 말아 30여 년간 방치(?)하고 있다가, 작년에 오랜만에 볕을 쪼일 겸 필자가 제주 사람이라는 이유도 한몫해서 이를 슬며시 꺼내 보여주셨고, 그간의 우여곡절 끝에 이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먼지가 쌓인 들쭉날쭉한 두루마리 종이 뭉치를 꺼내면서 "부친은 화가가 아닙니다.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아요"라는 신이치씨의 말이 생생하다. 아니 이보다 더 생생한 것은 내 앞에 펼쳐진 그림들이 도화지도 화선지도 캔버스도 아닌 선물 포장지를 뒤에 대서 만들어진 흔한 두루마리 종이였다는 점과 그 위에 100년 전 제주의 사라진 시간과 공간이 고정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 ▲다케노 세이기치는 주변에 널린 선물포장지 등을 재생해 그 뒷면에 그림을 그렸다. 물론 100년 전 제주풍경그림이라 해서 무조건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메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부모와 함께 10세 때 제주성내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제주 성벽을 비롯한 건축유적들과 과거 탐라의 흔적들이 있었고, 바로 그것들 주변에서 놀곤 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일본 정부의 도시근대화 정책에 따른 공공영역의 증대와 다양한 전개에 따라, 자신의 유년의 뜰이 사라짐은 물론 제주의 역사공간이 해체되는 것을 진정으로 유감스럽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림 여백에 세밀한 설명과 함께 당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가 남긴 그림풍경은 모두 근대도시화 정책이 펼쳐지기 이전인 1910년대와 그와 연동하는 시대의 것들뿐이다. 바로 이 점이 필자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 첫 번째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다면 다케노씨 개인과 관련해서 당시 제주성내와 일본인 재류자 현황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1905년에 펴낸 '조선의 보고: 제주도 안내'에 따르면 1905년 당시 제주성내 일본인 체류자는 모두 32명이다. 이 가운데 14명이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직업별로는 어부 4명, 관리직 2명, 잡화상 2명, 해산물 중매 2명, 과자상 1명, 우편 수취소 1명, 여인숙 1명, 목수 1명이었다. 이런 주변 사회 환경 속에서 유년을 보낸 다케노씨가 귀국하여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소일거리 삼아 그린 100년 전 제주풍경은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도민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하겠다. 앞으로 이들 그림 속에 담긴 내용들을 소개하고, 이들 풍경과 함께 앞으로 월 2회 독자 여러분들과 먼 과거로 제주미학산책을 나설 것을 약속드리며 본 연재글의 프롤로그를 대신하고자 한다. <미학자·번역가> ![]()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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