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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자의 제주미학 산책
[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3)1909년경 제주읍 산지 풍경(상)
제주읍성 옛 건축물 생성소멸 역사의 현장이 한눈에
입력 : 2013. 05.15. 00:00:00

▲다케노 세이기치가 그린 1909년 제주읍 산지천 일대 풍경(38×55㎝). 동문과 광제교, 중인문, 공진정, 삼천서당 등과 함께 1780년 김영수 목사가 산지천 서안에 옛 성터를 따라 쌓았다는 간성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

동문으로 들어가 광제교 건너니 중인문에 이르러
북수구 위 공진정·수재 양성소 삼천서당이 생생
1780년 김영수 목사가 쌓은 간성의 존재도 확인

우리들 주변의 건축물들은 일상의 삶과 꿈의 실현, 나아가 그 공간을 영위하는 공동체 가치들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변형되거나 쓸려 갈 것이며, 거기에 연루된 문화경관 또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탄생·소멸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 승효상은'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에세이에서 모든 건축과 도시는 무너질 운명이며 '영원한 것은 우리가 같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기억만이 진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일까?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생활역사 공간을 뒤돌아보며 과거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건물의 장소에 기념비(탑)를 세운다든가, 멸실 위기에 처한 어떤 건축물에 대해서는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움직임들이 활발하다. 이런 움직임이야말로 어찌 보면 우리시대 공동체의 단합을 유도하는 간접적 캠페인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엔 정치적 지도자가 그랬다면, 문화의 시대를 사는 21세기는 '이야기'나 '풍경' 그리고 '구축물' 등과 같은 그 땅의 모든 사연들을 전해줌직한 문화적 상징물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오늘 얘기할 산지천 일대는 제주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에 연루된 구축물들의 수많은 사연을 담은 역사의 현장이다. 제주 성곽의 동북쪽 일대에 속한 그곳은 예부터 방어진지(성벽)라든가, 샘물, 포구, 빼어난 자연경관을 일망할 수 있는 정자와 배움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읍성철폐령과 함께 그곳을 에두른 성벽이 무너지고, 과거 건축물들의 자리엔 측후소 및 요정, 공장부지, 제주신사 등이 들어섰다. 지금까지 제주역사에서 이 일대만큼 회자되어 온 장소도 드물 것이다. 다만 전해지는 대부분이 문자기록이고,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개별 장소와 구축물들에 대한 열거와 소개에 그치고 있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개별 축조물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생성소멸했던 전체로서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탐라순력도'(이하,'순력도')는 이형상이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해에 각 고을을 순력한 후 남긴 화첩이다. 이는 18세기 초 당시 제주의 관아 건물, 군사시설, 지형, 진상품, 풍물 등을 시각화한 기록물로 제주도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와 같은 제주를 담은 시각자료는 적어도 20세기 초반까지는 전무후무한 것이라, 특히 그간의 생활역사공간 파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까 제주가 말 그대로 오롯이 '스캔'되어 시각자료에 등장하고, 그것이 생활역사 자료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흘러야 했다. 사진 매체의 등장이 그것이다. 물론 그것 또한 외부인들의 시선을 통한 것이었다. 이 맥락에서 오늘 첫 공개하는 다케노 세이기치의 '1909년경 제주읍 산지의 풍경'은'순력도'와 사진의 전성기를 맞는 1920년대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중요한 시각자료라 할 수 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중 '건포배은'. 1702년 제주성 전경을 확인할 수 있다.

'순력도'중 '건포배은'에 그려진 산지 일대('순력도' 중 파란색 둥근 □ 부분)를 다케노 그림과 겹쳐서 보자. 전자에서 산지 일대는 그림 일부로만 등장하지만, 후자에서는 그 일부분이 전체 화폭을 채우고 있다. 우선 그림 상단 우측 ①동문을 기점으로 동성(東城)을 이루고 있는 북서쪽 성벽과 치성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 중앙엔 산지천이 흐르고, 그것은 ③북수구를 지나 건입포로 빠져 나간다. 성 밖엔 몇몇 초가집들도 보인다. 이상은'순력도'에도 간결하게나마 묘사되고 있다. 그간 200여년이 지났어도 성안의 배치와 동성 주변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다케노 그림은'순력도'에선 과감히 생략된 이 일대 많은 구축물들을 비교적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전체로서의 공간 속에 어떻게 배치됐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케노 그림의 ①동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동문에 들어서면 대각선 방향으로 초가집들이 늘어서 있다. 집들 사이로 좁고 굽은 길이 나 있고, 이 길은 산지천으로 내려와 광제교(다케노 그림에서 파란색 □ 표시. 동문길과 산지목골을 연결하는 교각 없는 징검다리)와 연결된다. 그 다리를 건너면 산지목골(일제강점기엔 혼마치, 나중엔 칠성통으로 불림)의 관문인 ④중인문이 나온다. 그림은 또 1780년 김영수 목사가 산지천 서안에 "옛 성터를 따라 간성을 쌓았다"고 말로만 듣던 '간성(間城)'의 존재도 확인케 해준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1909년경 얘기다.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케노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구축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진다. 1914년에 ①동문과 ④중인문이 헐리고, 제주성담은 1925∼1928년에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대부분 헐렸다. 그리고 일본인들 스스로가 일찍이 관광명소로 인정하여 엽서에 까지 소개된 아치형 석교 ③북수구가 1927년에 대홍수로 무너지고 만다.

한편 다케노 그림에서 빨간색 ○ 건물에 눈을 돌려보자. 이것은 1652년 목사 이원진이 북수구 위에 건립한 공진루(拱辰樓)의 후신으로, 이후 중수·개칭·이전을 거쳐 비로소 이곳에 자리 잡은 공진정(拱辰亭)이라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이곳을 기도처 또는 피서지, 그리고 손님이 오면 접대하는 장소로도 활용했다 한다. 하지만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 때 측후소 부지가 되었다가 1928년 제주 신사를 지을 때 헐린다. 다케노 그림엔 1736년 김정 목사가 공진정 입구에 창설해서, 제주의 많은 수재들을 길러냈다는 ②삼천서당도 등장한다. 이곳은 광복 이후까지 보존돼 왔으나 1958년에 헐렸다.

▲1926년 1월 'Geographical Review'에 수록된 미시건 대학 Burnett Hall의 논문에 실린 1920년대 초반 제주읍 풍경.

▲1930년 7월 '日本地理大系12 朝鮮編'에 실린 1920년대 후반 제주읍 풍경.

마침 다케노 그림에 나오는 산지 일대를 1920년대에 포착한 2장의 사진이 있다(인용사진). 다케노 그림을 포함하여 그 2장의 사진엔 아직 공진정(빨간색 ○ 표시)이 건재했었다. 그리고 거기엔 앞에 언급한 광제교(파란색 □ 표시) 원경도 각각 담겨있다. 이처럼 개별 축조물들의 탄생과 소멸이 연루된 산지 일대를 이리저리 산책하면서, 지구상의 어떤 터전(땅)이든지 그 터전에 태어나 살다 죽어간 사람들의 숨결, 그곳을 점령하여 다시 일구려 했던 외부인들의 야망, 그리고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꿈이 서로 어떻게 맞물려서 그 터전의 터전다움을 지켜주고 기억해야하는지를 내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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