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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일 오후 제주의 두 별이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백(87)과 그의 집안 형인 변시민 전(前) 제주대학 학장(96)이 바로 그들이다.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31년 가족과 함께 도일(渡日),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작가로서 천재적인 능력이 드러난 것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광풍회전(光風會展)'이었다. 1947년 '겨울나무'로 입선한 그는 그 이듬해인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1957년 한국으로 돌아온 변 화백은 서라벌예대를 거쳐 고향인 제주대 교수를 역임하며 작품활동에 몰입(沒入)한다. 그의 작품세계가 '일본시대'와 '서울시대' 그리고 '제주시대' 등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 이유다. 서울시대가 사실적 자연주의로 고궁(古宮)을 즐겨 그려 '비원파'로 불리었다면, 제주시대는 황톳빛 가득한 화폭이 주를 이룬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그림을 위해 고독한 싸움을 멈추지 않은 시기였다. 변 화백은 일본과 한국에만 머물지 않고 그 지평(地平)을 세계로 넓혔다. 동양인 최초로 160년 전통의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작품 2점을 10년간 상설 전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 야후가 선정한 '세계 100대 화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작품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결과다. "점 하나로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던 변 화백이었다. 그는 언젠가 한라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림은 느낌의 세계다. 곧 대상을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그리는 것이다. 내 예술의 모태(母胎)는 바로 풍토(風土)다." 독특한 화풍으로 화산섬 제주의 바람과 까마귀와 사람을 그려온 변 화백이 세상을 떠나던 날, 제주의 바람과 많은 비가 고인(故人)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같은 날 타계한 변시민 전 학장도 우리나라 교육계의 거목(巨木)이었다. 일본 제4고등학교 시절 항일(抗日)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귀국 후 교육계에 투신한다. 한국사회학회 창립 회원으로 서울대를 비롯 충남대와 한양대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인구문제연구소장을 지냈다. 특히 지난 1976~1979년 4년간 제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캠퍼스 통합이설 사업을 추진했다. 또 공부하는 학생과 연구하는 교수상 정립 등을 내세워 대학을 이끌면서 제주대가 종합대학교로 웅비(雄飛)하는 발판을 다졌다. 흔히 제주지역사회엔 "진정한 원로(元老)가 없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과 이력을 한순간 망각한 채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등 스스로의 허물 탓이 우선 크다. 하지만 '사촌이 밭을 사면 배 아파 하는' 우리네 마음도 그 이면엔 깔려 있다. 지역이 좁다보니 누구네 집안 숟가락 몇개 있는 것도 다 알고 있다는 게 제주사회다.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고 칭찬에 인색한 것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다. 우리 사회가 통합(統合)의 길로 나아가려면 '허물'은 허물대로, 잘한 일은 높이 드러내어 현양(顯揚)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해야 한다. 언제까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아웅다웅 살 것인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커다란 족적(足跡)을 남기고 이제 세상과 이별한 변시지·변시민 두 분의 명복을 삼가 빈다. <논설실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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