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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도 아닌 6월 호국보훈의 달에 때 아니게 주변이 4·3 얘기로 들끓었다.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에 4·3유족회 회장단이 경우회의 초청으로 참석했다. 한편 도지사가 기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폭도놈들이 끼어들어서" 4·3사건 진압에 경찰이 나선 것으로 발언해 설화(舌禍)에 휩싸였다. 한 경찰 출신 인사는 중앙일간지에 4월 3일이 무장반란 개시일이기 때문에 국가추념일 날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어서 현길언 교수가 정부 위원회의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정치권력에 야합한 왜곡된 결과물로 폄하하는 비평의 글을 발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또한 4월 3일을 추념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방송 인터뷰를 통해 드러냈다. 이런 와중에 국회 본회의에서 4·3특별법이 개정돼 국가의 유족 복지 대책을 법적으로 명시하고 국가추념일 지정을 정부에 요청했다. 2003년 대통령 사과에 이은 4·3의 주요 국정 과제가 마무리됐다. 특히 박근혜 보수정부 하에서 핵심 과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은 4·3을 이념의 편 가름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합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시점에서 4월 3일 추념일 문제는 향후 대통령 시행령 확정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과연 보수 인사들의 지적처럼 4월 3일은 무장반란 날짜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보편타당한 견해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4·3'은 1948년 4월 3일 새벽 한라산의 유격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및 우익단체원을 겨냥해 무장 습격한 날을 기억해 붙인 사건 명칭이다. 그러기에 이날 이후 정부는 '4·3'을 사건의 앞에 붙는 공식 명칭으로 써왔다. 4월 3일 발단이 된 사건 명칭이 이날을 전후로 해 장구한 시간에 걸친 총체적 사건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로 쓰게 됐다. 그러나 성격 규정을 둘러싸고 '4·3'의 뒤에 따라와야 할 후속 명칭은 '사건', '사태', '폭동', '반란', '소요', '봉기', '항쟁', '양민학살'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4·3특별법과 진상조사보고서는 수많은 희생자의 진상을 드러냄으로써 정부의 이름으로 명예회복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근거이다. 현길언 교수의 견해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편파적인 역사학자나 언론인이 전염시킨 악령에 이끌려 4·3보고서를 추인했고,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정부에 저항해 일어난 사태"라고 하여 무장 반란의 정당성을 말한 것일까? 수많은 희생의 실상을 밝혀내는 것이 반란으로 규정하는 일보다 못한 하위에 있는 과업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따지는 일이야 말로 정부의 일이 아니라 학계의 몫이고, 지금을 넘어서서 후대의 과제일 수 있다. 그러기에 2003년 정부의 고건 총리 또한 진상보고서의 서문에 "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고 후세 사가들의 몫"으로 돌렸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과 제주도민들 가운데 4월 3일을 항쟁 기념일로 여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6월 25일을 북한의 남침을 기념하는 날로 보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 '4·3'은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단서가 된 날짜로서 보편 상징성을 띤 사건의 명칭이 됐고, 제주도민들은 이날을 위령의 날로 여기고 있다. 의도적인 4·3사건에 대한 폭동(반란)과 항쟁의 양분법적 인식을 벗어나서 화합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적인 따뜻한 인식과 해법이 더욱 절실한 때라고 생각해 본다. <박찬식 역사학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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