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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①) 다케노 세이기치의 '제주읍 성내 서문으로부터 서문천을 지나∼'(8.7×13.7㎝). 한라산서 발원 병문천 성담 따라 바다로 흘러 1930년대 주민 공동작업으로 '세멘다리' 가설 오늘은 다케노 세이기치의 그림과 함께 100년 전 제주성 서문 부근의 풍경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볼까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산지천 동쪽 동문을 출발하여 남문을 거쳐 서문이 있었던 곳에 당도했다. 문득 80년~100년 전까지만 해도 건재해 있었던 조선시대 구조물인 '성(城)'과 그 해체를 전제로 한 도시 근대화(modernization·urbanisation)는 지금의 시점에서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100년 전, 50년 전만 그랬던가! 그 후로도 우리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전제로 초고속 근대화의 시대를 살아왔다. 이를 위해 도심은 더 많은 도로와 대지를 확보하기 위해 언덕을 깎고, 하천을 복개하고, 바다를 매립하는 등 실로 5년, 10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생활문화경관을 계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다. 그러니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제주·전통·문화·경관'의 파괴와 복원은 과연 시점, 어떤 기준에서 가야 하는지 솔직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런 심정으로 오늘 나는 100년 전 제주성 서문 '터' 주변을 서성거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이 주변을 살았던 다케노의 그림①과 증언이 나를 이곳에 오게 하였다. 과연 그 누가 이 풍광을 현재의 관덕정~성내교회~서문로터리(복개된 병문천)~제주향교 주변이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까? 필자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성벽과 성문, 길과 하천 등등. 사실 이에 대해선 관련 문헌을 보고, 화가의 메모를 참고하고, 아는 어른들에게도 묻고, 현장을 몇 번 탐방한 후에라야 그나마 아련히 이해할 수 있었다. ![]() ▲(사진 ②) 미국인 동물학자 앤더슨이 촬영한 1913년 제주성 서문. ![]() ▲(사진 ③) 앤더슨의 기행문이 실린 월간지 표지(1914년 4월). 한편, 1914년에 훼철된 서문 터에 관해 말하자면, 현재 이를 알리는 표석이 관덕정에서 정서쪽으로 난 길에 세워져 있으나, 오히려 그것은 제주역사 연구가인 김익수, 고영철의 지적에도 있듯이, 지금의 성내교회 건너편 건물들 주변에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케노 역시 '관덕정에서 서문으로 나오려면 서남쪽으로 100~120미터 올라가야 한다'고 메모를 남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서문의 정면을 담은 사진②가 흥미를 끈다. 이는 서문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으로, 김봉옥의 '제주통사'에 소개되어 이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출처에 대해선 아직까지 언급된 바가 없는 것으로 보여 덧붙인다. 근년에 개인적인 연구 차원에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미국인 동물학자 앤더슨(M.P. Anderson)으로, 그는 1913년 8월에서 와서 40일간 제주에 머물면서 한라산 등지에서 조사한 후, 귀국하여 이듬해 '오버랜드 먼슬리'(사진③)라는 월간지에 '켈파트 섬에서 40일간'이라는 기행문을 이 사진을 포함한 여러 사진들과 함께 싣고 있다. 한편, 다케노의 그림① 서성 안에 보이는 건물들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우측 하단 빨간색○로 난 도로는 관덕정으로 이어진 도로라는 메모가 있다. 이를 놓고 볼 때 그 옆 초록색○는 김익수 선생의 의견에 따라 '출신청(삼도동 905)' 건물로 볼 수 있다. 김윤식의 '속음청사' 에는 "첩(堞)을 따라가다가 서문 아래에 있는 출신청을 보았는데…."(103쪽)하는 대목도 이와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출신청 건물이 1910년에는 성내교회당으로 매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역사의 간극을 약간 좁힌듯하다. ![]() ▲(사진 ④) 지금의 제주시 서문로터리 주변. 관덕정, 제주향교, 서사라, 탑동 등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그림① 상단 파란색○(현 서문시장 위)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이 일대는 거의 소나무 밭이었고,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그림엔 매우 작게 그려졌지만, 일종의 '홍살문' 표시도 보인다. 즉, 이는 관청 또는 능, 묘 따위가 있다는 의미로 주지하다시피 이곳은 제주향교가 있는 곳으로 1827년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할 것은 향교 북쪽(파란색○ 우측)으로 펼쳐진 민가들이다. 이곳은 일명 '부러리 동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주향교 뒤편에 동~서로 난 옛날의 한질(큰길. 폭 2.5m)을 '부러릿질'이라고 불렀다. 또 병문내 하류엔 과거 벌랑포(伐浪浦)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지점을 '부러릿내'라고 하고, 그 포구를 '부러릿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을엔 지금은 매립되어 볼 수 없으나, 비룡못(현재, 비룡1길-어린이 놀이터)이라는 연못도 있었는데, 그 못은 남북으로 된 타원형으로 용이 날아갈 정도로 컸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게다가 이 일대는 용담동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라 전하고 있으니 그 땅의 역사와 삶의 자취에 궁금증이 한층 증폭된다. <미학자·번역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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