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제주성내 서문천 하구 부근'(다케노 세이기치 그림, 18x130cm)
산지천·한내 등 제주성 3대 하천으로 자연부락 형성수전소 위치 벌랑포·마을 수호신 복신미륵 자리잡아
오늘은 다케노 세이기치 그림①과 함께 옛 제주성 서문을 끼고 바다로 흐르던 병문천 하구로 걸음을 옮겨본다. 과거 제주성 주변으로는 동쪽에 산지천이 흘러 그 하류엔 건입포가, 성을 끼고 서쪽엔 병문천이 흘러 그 하류엔 벌랑포(伐浪浦)가, 그 너머로는 한내(大川)가 흘러 그 하류엔 용연과 같은 천혜의 풍광을 품은 대독포(大瀆浦)라는 포구가 있었다. 이들 하천과 포구들은 시대에 따라, 신분에 따라 그 한자표기나 명칭을 약간 달리 했는데, 여기서는 '해동지도 제주삼현도'(1750년경 제작, 그림② 빨간색○참조)에 기록된 명칭을 따르겠다.
하지만 '병문천'의 명칭과 표기인 경우, 이는 여러 고문서를 통해 보더라도 오래전부터 그렇게 비교적 일관되게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병문천의 '병'자가 주로 병풍 병(屛), 간혹 군사 병(兵), 아우를 병(倂)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만큼 이들 각각의 한자어가 이 주변의 역사와 됨됨이를 반영해 왔다는 말이다.
한편,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30여년을 살았던 다케노의 경우는 그림①을 그리고, 그 제목을 '서문천(세몬가와)'이라 하고 있다. 물론 그곳은 우리가 말하는 병문천이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하천 근처에 있던 서문과 연동해서 붙인 명칭이 아닌가 본다. 어쨌든 그림①에는 그의 유년의 기억이 담겨있다.

▲② '해동지도 제주삼현도' 중 옛 제주성 주변의 하천 하구(1750년경 제작)
그에 따르면 "(제주도) 여기저기에 있는 하천은 비가 올 때 이외에는 물이 없다. 군데군데 도랑가에서 일정 양의 샘물이 나온다. 따라서 해안선을 통틀어 각 지역에는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들 용천수로 생활하고 있다. 이 하천도 물이 별로 나오지 않으나 그림① 상단 좌측에서 물이 솟아난다. 이 하천은 바다와 가까워 은어, 모쟁이(새끼숭어), 장어 등이 서식하여 나 역시 한때 신나게 낚시나 그물낚시를 하던 곳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림① 상단 좌측, 민가가 모인 곳에 시선을 돌려보자. 이곳은 병문천 하구로 일명 '동한두기' 마을이다. 서쪽의 한내(大川)에 있는 '대독'이라는 포구가 일상에서는 '한독~한두기~한데기'라 불렸는데, 이 마을은 그 동쪽에 있다 하여 '동한두기'가 된 것이다. 어쨌든 서쪽 한내와 병문내 하류에 있는 한두기 마을은 기록상 용담동 지역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랜 촌락으로 알려졌다.

▲③ '탐라순력도'(1702년 제작) 중 '제주조점'
'촌락'이란 말이 나와서 떠오르는 광경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제주도 조사를 위해 1935년 내도한 바 있는 일본인 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치가 지적한 대목이다. 그에 따르면 제주도 촌락 경관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마을 도로 구석에 있는 연자매집(몰방애집)과 또 하나는 용수가 나오는 물통(用水井)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하여 마을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포구'일 것이다. 그것이 해안가 마을들인 경우에는 말이다. 앞서 말한 제주성 주변을 흐르는 3대 하천의 하류에 포구가 있어, 오래전부터 자연마을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④ 벌랑포(병문천 하구)에 정박한 옹기운반선(출처 :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제주시')
동한두기 마을에 있었던 벌랑포(伐浪浦·부러릿개·버랭이깍)만 해도 이는 일찍부터 고문서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 포구는 제주목 우방에 있던 수전소(水戰所) 4곳 중 하나였다. 이 말은 즉 이 포구에는 전시를 대비해서 배와 노 젓는 군사를 항시 배속시켜 성(城)을 지켰고, 인근에서는 군사훈련도 겸했다고 전해진다. 1702년 서문 밖 병문천 하구 주변에서 군사들이 열병하여 성정군의 조련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장면(그림③) 역시 조선 후기 이 부근의 일상풍경을 가늠케 한다. 또 이 포구엔 동쪽 건입포 부근의 것과 한 쌍을 이루는 '복신미륵'이 오래전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제주성 바깥에서 성안을 굽어보는 형상을 하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마을 백성들 역시 이곳 포구와 물, 그리고 성소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어촌마을을 형성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이후, 근대화의 물결(전기, 수도, 선박, 자동차 등) 속에 주변 문화경관과 공동체의 생업 등이 차차 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병문천인 자연지형마저 복개(覆蓋)되어 도로가 되고 대지가 되고, 주변 바다(탑동)가 매립되는 지형상의 격심한 변화는 1990년대 이후 일이다.

▲⑤1981년경 벌랑포 풍경과 한두기마을 사람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제주시지역사 조사수집자료)
복개가 되기 전 병문천 하구를 배경으로 담은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사진④에는 20세기 초부터 80년대까지 남해안 등지를 오가던 옹기운반선과 주변에서 물놀이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이미 알려진 사진이지만, 아쉽게도 촬영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반면 사진⑤는 1981년경에 촬영된 이곳 풍경이다. 당시 '한두기마을회' 주민들이 포구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사진 속 하천 건너엔 굴뚝과 함께 큰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60년대 제주경제의 주역이었던 '(옛)유창산업' 건물이다. 어쨌든 이 두 사진에 담긴 내용은 다르지만, 자연경관과 포구의 됨됨이는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케노의 그림①을 따라 병문천 하구를 산책하면서, 저쪽 동쪽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자리를 지켜온 산지천의 역사가 문득 떠올랐다. 산지천은 1968년부터 1982년까지 수차례 복개작업을 하여 한때 지역경제의 축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순기능 보다 오염, 악취, 침수 등의 부작용이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다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옛 모습에 가까운 하천으로 복원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하천 주변으론 또 다른 도시경관계획이 검토 중에 있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산지천보다 뒤늦게 복개된 병문천은 앞으로 어떤 밑그림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며 미래를 맞이할지 지켜볼 일이다. <끝> <미학자·번역가>
※ 다케노 세이기치 그림을 통한 제주미학산책은 이상으로 일단락합니다. 그동안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