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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모든 게 덧없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모든 게 막연하고, 우울하며 피곤하기만 합니다. 책을 펼쳐놔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눈이 아픕니다. 나름 중심을 잘 잡고, 옳다고 믿는 가치대로 살아왔다는 자긍심에도 의구심이 듭니다. '나는 과연 잘 살아왔는가?', '여태까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룬 것일까?', '아니 무엇 하나 이룬 게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나의 아버지는 이발사였습니다. 소년기에는 이발소에 딸린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온종일 손님들의 머리칼을 자르고, 나는 펌프질을 해서 이발소에서 사용할 물을 긷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을 쓸었습니다. 또 손님들의 머리도 감겨주었지요. 그때 얼른 어른이 돼서 고생하는 부모님을 호강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학생 때 시(詩)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반대를 했습니다. '글쟁이는 가난해서 안 된다'고 하셨지요. 고등학생 땐 미술선생님이 미대에 진학하라고 강권했지만 글쟁이는 가난하다고 반대한 아버지가 환쟁이를 허락할리 없었습니다. 가난한 집의 맏이로서 부모님의 뜻을 따랐지만 부모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지요. 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존대를 했습니다. 단순하게 경어만 사용한 게 아니라 아내의 의견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혼인과 동시에 이름을 잃는 여자들의 처지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항상 이름을 불렀고, 이름 뒤에는 '씨'를 붙였습니다. 새벽잠이 많은 아내를 고려해서 맞벌이를 할 때부터 아침밥을 짓고, 늘 기색을 살피면서 '무엇을 함께 하면 즐거워할까?'를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아이가 생기기전까지 5년여 동안 보름에 한번 꼴로 여행을 다니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산 뒤에도 회사에 다니겠다는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이 아이에게 할애되었습니다. 아이가 실컷 자고, 먹고, 언제든지 나들이를 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또 세돌까지는 이유식이며 간식까지 모두 만들어 먹였지요.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분당에서 제주도로 이주를 했습니다. 천당아래 분당이라는 곳이 쾌적하고, 문화적인 여건이 잘 갖추어진 도시였지만 사교육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유소년기만이라도 자연 속에서 실컷 뛰어놀도록 배려하고 싶었지요. 처음 교래분교에 다닌 아이가 무척이나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아이들끼리 말을 타러 다니고, 미니미니랜드에 가서 놀고, 여름방학 내내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면서 좋아했지요.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눈 때문에 아내의 출퇴근에 문제가 생겼고, 서귀포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학기를 다닌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 했고, 질식할 것 같은 학교의 분위기를 알고 있던 터라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4년여 동안 홈스쿨링(?)을 했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아이랑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같이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동안에 둘이 배낭여행도 한 달씩 두 번이나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주었지요. 그렇게 지낸 아이가 작년에 육지의 대안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혼인 전에는 부모님, 그 다음에는 아내, 아빠가 된 다음부터는 아이를 위해서 온전히 시간을 쏟은 것 같습니다. 이 가을에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도리를 다했는가?' 나름 열심히 한 것 같기는 한데 자꾸 잘못한 기억들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하면서도 딱히 잡히는 게 없습니다. 내년이면 나이 오십인데. <오성근 작가·둥구나무 찻집&민박 대표>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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