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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춘 칼럼
하얼빈驛의 '안중근 기념관'
입력 : 2014. 01.21. 00:00:00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하얼빈 역에서 6발의 총성이 울렸다. 젊은 조선인 안중근(安重根)의 손에 들린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분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중국 대륙의 정적을 흔들어 깨웠다. 대한남아의 기상을 유감없이 떨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이른바 '안중근 의거'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인 조성녀 마리아(안 의사도 천주교 신자로 도마(토마스)란 세례명을 가졌다)가 편지를 보내왔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인 줄을 알아라. 살려고 몸부림 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하게 목숨을 버리거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너는 대한을 위해서 깨끗하고 떳떳하게 죽어야 한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 하노니…."

수의를 만들며 아들을 가슴에 묻었을 어미의 처연함이 어찌 없겠는가.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독립운동에 몸담으며 무엇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여장부의 의연한 기상이 엿보인다. 안중근 의사(義士)도 어머니의 뜻을 따라 일본 순사들이 존경할 정도로 언제나 당당했다. 죽음을 앞둔 재판정에서조차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렇게 외쳤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총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의거(義擧) 5개월 후인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가 지어준 흰색 수의를 입고 뤼순(旅順) 감옥의 교수대로 향한다. 그리고 '동양평화'의 뜻을 남기고 순국(殉國) '민족의 큰 별'이 된다. 그의 나이 만 31세 때의 일이다.

100여년의 시공(時空)을 뛰어 넘은 2014년 1월19일, 중국의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됐다. 기념관 입구는 하얼빈역의 옛 모습을 축소한 모습으로 꾸며졌다. 입구 외벽 벽면에는 '오전 9시30분'에 고정된 벽시계가 걸렸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시간이다.

중국 정부에 의해 개관된 기념관은 안 의사의 흉상은 물론 생애와 업적, 사상 등을 총체적으로 망라해 전시하고 있다. 특히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과 관련 "당시의 구상은 특정국가의 이익을 벗어나 지역경제공동체와 블록경제론, 공동방어론을 주장한 것이었다"며 안 의사를 '동양평화의 창의자(創意者)'로 칭송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숨은 의도'를 떠나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안 의사는 "국권(國權)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10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우리는 유해(遺骸)조차 찾지 못한 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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