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은 나무 뿌리처럼 거칠고 마디가 굵다. 평생 농사만 지은 늙은 농부들의 손처럼. 5만 평 농원에 일거리가 없는 날이 없으니 그렇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걷기 힘들었을 때도 가마니와 비닐을 깔아놓고 앉아 풀을 뽑았다. 매실 나무 아래 야생화와 보리도 일일이 그의 손으로 매만지며 가꾼 것이다. 요즘도 매실나무 가지치기를 할 때면 맨 먼저 시범을 보인다. 일꾼들에게 맡겨놓고 앉아서 감독만 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매실 명인' 홍쌍리. 전남 광양에서 청매실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의 지난 삶이 '인생은 파도가 쳐야 재밌제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왔다. 홍쌍리가 틈틈이 써놓은 편지와 일기, 시(詩)도 담겼다. 된장, 고추장, 김치처럼 매실은 어느덧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이 되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매실이 어떻게 지금처럼 대표 먹거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해마다 열리는 매화 축제에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는 걸까. 그것은 "사람들 오면 어둡고 괴로운 맘 섬진강에 다 띄워 보내고, 온 산천 가득 핀 매화꽃들을 보며 활짝 웃게 하고 싶다"는 홍쌍리의 소박한 꿈에서 시작됐다. 매화꽃을 딸, 매실을 아들이라 칭하며 외로움과 고통을 달래던 홍쌍리는 시댁 식구들의 꾸지람을 각오하고 밤나무를 조금씩 베어낸 자리에 매화나무를 하나둘 심었다. 오늘의 청매실농원이 만들어진 계기다. 홍쌍리는 50년 간 겪은 삶의 질곡을 "재미있는 파도였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 쉬운 파도가 아니었기에 "나처럼 너무 센 파도는 넘지 마이소"라고 농담처럼 덧붙인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손댔던 광산사업이 망하면서 빚더미에 앉았고 부인과 수술을 두번이나 받으며 죽음의 문턱에 이른 적이 있다. 고된 노동으로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아 몇 년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해마다 봄이 되면 매실과 씨름했다. 영화 만들던 김도혜는 홍쌍리와 만나 사계절을 보내면서 그에게 받은 인상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흙과 꽃을 사랑한 그가 매실 연구에 매진해 선구적 농민 기업가로 인생 제2막을 시작한 것은 나이 쉰이 훌쩍 넘어서다. 정작 나를 뒤흔들어놓은 것은 그가 무학의 시골 아낙네로 그 세월을 사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생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홍쌍리는 자연과 삶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우고 뜻을 세워 그것을 이뤄냈고, 늘 이웃에게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알마. 1만6500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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