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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단 하루도 말을 통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한 마디 말이 그만큼 소중하고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마디의 말도, 소중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6·4 지방선거를 바라보면서 말의 숭고함이 그립다.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하지만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고도 한다. 내면이 어느 만큼의 크기와 숙성을 지니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표출되는 행동이며 말에 의해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된다는 말이 아닌가. 이광수의 '우덕송(牛德頌)'에서 "아무도 쥐를 보고 후덕스럽다고 생각은 아니할 것이요, 할미새를 보고 진중하다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돼지를 소담한 친구라고는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에 대해 굳이 티를 뜯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람의 속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외모로,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선거 때만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말이 많아진다. 사람에 따라 솔깃한 말이 되기도 하고 황당한 말이 될 수도 있다. 더러는 미담처럼 마음을 따뜻하게도 하지만 또 더러는 잠잠했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말들도 어느 때보다 쉬이 횡행한다. 아쉬운 것은 이런 때의 말들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만 지나도 그런 말들이 있었는지조차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야 만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정치인들이 대중들의 이런 망각 증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한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왜냐하면 말의 가치를 낮추고 심지어는 말의 무용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로 말미암아 사회적 소통의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필사본 표지에 쓰인 이름인 롱기누스를 저자로 삼는 <숭고에 대하여>라는 저서가 있다. 로마공화정 붕괴 후 황제정이 시작되는 시기에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단순히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본 정도로 보기 쉬운데 사실은 정치 구조의 변화 속에서 말과 글에 대한 숭고함이 무엇이고 이것이 또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보여주는 저서다. 말과 글의 숭고함이 재현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웅혼한 자연을 대하면서, 신비한 자연의 운용을 느끼면서 어쩌면 숭고를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온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사람, 사람의 말을 통해 이런 숭고를 체험했다고 하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가까운 우리 주위에 이런 숭고함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롱기누스의 저작에서 숭고를 해치는 수사적 표현을 사례로 들었는데, 부적절한 과장, 절제 없는 감정 표출, 그리고 때에 맞지 않는 저속한 표현 등이 있다. 이런 것은 숭고까지 그 기준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좋은 말과 글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또 누구나 쉽게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접하게 되는 대중들도 선거 때만큼은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롱기누스 이후 1500여년이 지난 16세기에 이르러 칸트는 숭고에 대하여 '압도적인 큰 것 앞에서 느끼는 전율어린 감동'이란 미학적 표준을 세웠다. 바로 이 시기쯤에 도지사나 도의원 후보로 나선 이들이 정치적 성향을 떠나 지역주민과 도민들에게 하는 진솔한 말 한 마디를 듣게 되어도 전율어린 감동을 받을 것만 같다. 그러나 말이 많을 뿐이고 귀를 막고 싶은 말들뿐이다. 그만큼 숭고한 말이 몹시도 그립다. <좌지수 시인·문학평론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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