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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슬로시티
입력 : 2014. 06.02. 00:00:00
외로움에 푹 젖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종종 꾼다. 그것도 꿈이라 할 수 있느냐고 웃는 이가 있겠지만 최근의 필자에겐 꽤 절절하게 솟음치는 현상이다. 여유를 상실한 일상생활에 대한 반발인지도 모른다.

섬을 사랑하는 이로 이생진 시인만한 분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생진 시인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집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2001년엔가 명예 제주도민이 되신 분이기도 하다. 이생진 시인은 3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섬을 200개 이상 답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분의 섬 여행 방식은 그저 하염없이 걷는 것이라 했다.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걷다가 지치면 쉬고 또 걷고…. 이생진 시인을 꼭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 몇 년 동안 필자에게도 목표 비슷한 것이 생겼다. 생전에 우리나라 섬 100개쯤을 답사해보는 것이다. 지금껏 다녀본 섬도 헤아려 보니 얼추 20개는 된다.

이태 전이던가 청산도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섬 이야기가 나왔고 청산도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5월에 한번 가자고 이구동성 뜻을 모았다.

제주에서 청산도를 가려면 카페리로 완도에 도착한 후 다시 한 시간쯤 배를 타야 한다. 청산도 도청항에 닿았을 때 필자가 꿈꾸었던 호젓한 섬의 이미지는 느낄 수 없었다. 주말이었기 때문이다. 좁은 부두에 여객선은 한 시간마다 여객과 차량을 부려놓아 온섬이 사람과 차량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었다. 오후 한 시쯤 도착했는데 식당마다 사람이 가득차서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까스로 식사를 마친 후 우리가 민박하기로 한 집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민박집은 권덕리 바닷가에 있었는데 순환버스 노선 구간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슬로시티란 느림을 생활철학으로 하는 지역을 말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껏 게으름을 부려도 괜찮은 곳, 게으름이 미덕이 될 수 있는 사회, 참으로 매력있는 곳이 아닌가. 문자 그대로 청산도가 슬로시티라면 이곳에서는 시간과 경쟁으로부터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에는 3대 명품길이 있다고 한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 청산도 슬로길이라는 것이다. 청산도 사람들은 그 3대 명품길 중에서 청산도 슬로길이 으뜸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도청항을 출발하여 슬로길에 접어들었는데 30분쯤 걸어서 서편제 길에 도착했다. 서편제 길이란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리밭 사이로 난 농로를 소리꾼과 그의 여제자가 소리를 하며 가던 영화의 광경이 떠오른다. 유채꽃은 모두 지고 없었지만 꽃양귀비가 밭 가득히 피어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편제 길에서 보면 바다가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롭다. 천천히 걸어서 섬을 일주하고 싶었다. 며칠이 걸려서라도 말이다. 길을 가다가 섬사람이 보이면 무언의 미소를 보내면서.

서편제길에서 해안을 따라 걸었다. 몇 코스인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의 좁디좁은 바닷가 산길이었다. 한발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들에게는 솔직히 말해서 권하고 싶지 않은 난코스였다. 절벽 쪽으로 밧줄 같은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면 좋을 텐데 일부 구간을 빼고는 거의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느릿느릿 걸으면서 무엇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곰곰 성찰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다. 올레를 걸으면서, 혹은 청산도 슬로길을 걸으면서. <권재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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