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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며
[하루를 시작하며]내가 그대를 믿는 이유
입력 : 2014. 09.17. 00:00:00
9월 첫 날에 아들아이가 군대를 갔다. 블랙이글에 대한 동경과 故 이상희 대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공군을 지원했다. 3개월의 훈련과 3년간의 복무, 결코 녹록지 않은 기간이지만 나는 아들아이의 결정을 기쁜 마음으로 응원했다.

입대를 앞두고 보니 새삼 녀석에게 미안한 것이 많았다. 엄마로서 함께 한 시간이 너무도 적었다. 일한다는 이유로 나는 채 두 돌도 지나지 않은 녀석을 가건물 탁아방에 맡겼다. 걸어다니면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이방에 보냈다. 싫다고 손사래치는 녀석을 억지로 봉고차에 태우고 아침이면 윙윙거리는 녀석의 울음소리를 귀에 달고 일터로 향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도 녀석은 봉고차를 보면 내 등뒤로 숨었고 나 역시도 아이들을 태운 봉고차량만 보면 지금도 가슴이 시리다. 독자(獨子)인 친정노부의 외동이로 장남에게 시집와 어렵게 얻은 아들아이. 그러나 나는 현실을 핑계로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맞벌이 엄마에 불과했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아이는 고교 3년을 기숙학교에서 지냈다. 동네 수재들이 모인다는 그 곳, 장난이 심했던 녀석의 입학은 나에게 대단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성적만으로 아이를 몰아쳤던 교사와 부모의 욕심들, 지금와 생각하니 더없이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다. 조기진학을 놓치고 녀석은 낙담하여 음악 쪽에 심취했었다. 두성법(頭聲法)이라는 이론에 빠져 지내다 의논도 없이 외국으로 떠났다. 한 번 맘먹으면 하고야 마는 녀석의 고집에 얼마나 속끓이며 가슴앓이를 했던가.

5년이란 세월을 나라 밖에서 머물다 지난 설에야 녀석이 돌아왔다. 집 떠날 때 붙어있던 두툼했던 살집도 튼실했던 허우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턱에 커다란 눈망울만 덩그렁했다.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내 손을 잡으며 주절거리는 녀석의 새해인사에 나는 시어머니가 계신 것도 잊고 소리내어 울었다. 식구라고는 달랑 딸아이와 녀석뿐인 것을 그동안 우리는 명절 한번 함께 하지 못하고 이산가족처럼 살았다. 불현듯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와 앉은 것처럼 가슴을 옥죄던 갑갑증, 그때마다 실향의 아픔을 독주(毒酒)로 달랬던 아버지가 생각났었다. 낯설고 말설은 대륙에서 혼자서 덩그라니 얼마나 외롭고 고달팠을까. 녀석 성격에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공부하는 하루하루가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입대가 확정되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훈련소로 떠나기 전 며칠이라도 녀석과 함께 있고 싶었다. 아니 녀석이 좋아하던 갈비와 두부조림, 내 손으로 직접 밥을 해먹이고 싶었다. 한국에 들어와 있던 지난 몇 달도 이런 저런 일핑계로 함께 못했던 무심한 어미가 아니었던가. 나와 함께 하는 녀석의 아침 밥술은 농사일꾼 만큼이나 컸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먹는 아침에 입맛이 실하지 않으련만 엄마가 해주는 밥이 최고라며 나를 치켜세웠다. 변변치 못한 밥상임에도 끼니마다 그릇 바닥이 보이게 먹어주는 녀석의 넉넉함, 조금도 걱정말라고 나를 달래는 눈치였다. 아직도 내 가슴엔 꼬작꼬작한 얼굴의 장난꾸러기가 뛰어놀건만 언제 이렇게 장성한 걸까. 나는 시공을 넘나들며 녀석의 유년기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떠났다. 본인이 원하던 공군의 품으로 갔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고 보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지만 이왕이면 멋지게 해내고 오겠다며 웃던 녀석의 넉살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대를 믿는다'. 훈련소 입구에 새겨진 구호를 가르키며 힘차게 손을 흔들어대던 녀석의 배포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아들, 건강히 잘 다녀오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야 눈물이 난다. <허경자 서귀포문화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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