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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마을 전경(위)과 곡선이 아름다운 마을안길 풍경(아래) "떠났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살 수 있었으면…" 4·3 광풍 휘몰아치면서 100여명의 청년 희생 인재 잃은 슬픔 극복…교육열로 공동체 회복 젊은이들 떠난 자리에 80여명의 귀농인구 정착 다시 돌아오는 곳 됐으면 ![]() 1975년 도로포장용 골재를 채취하다가 면의마루 옆에서 마제돌도끼 2점과 돌끌 1점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명확한 증거다. 목축이 중심 생업이었던 100여 년 전까지는 소낭가름지역에서 살다가 차츰 제미터, 굴집터 부근으로 이주하였고 결국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성산읍에서 제일 비옥한 토질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화학비료를 쓰기 전에는 많은 부분 토질에 의존한 농경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번성은 농산물의 소출량과 비례하였을 것이다. ![]()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마을안길의 검은 돌담과 어우러진 감귤. 한 집안에서 자식농사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마을 입장에서는 양면성을 가진다.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후손들이 더 많은 세상을 만났다는 것이다. 마을공동체의 생명력이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회원의 수의 열 배에 달하는 노인회 회원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된 것이다. 정현수 청년회장의 아버지인 정길남(72)씨는 "80세가 될 때까지 노인회원 가입을 거부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특한 성격으로 보기보다 가슴 저린 난산리의 현실을 웅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60세까지 청년이고 80세까지가 중년으로 생각하는 삶의 터전. 장수마을이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래는 모습이 이어질지 모른다. 시간은 흐른다. 난산리의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고 해야겠다. 난산리가 키워낸 인재들이 떠난 자리에 벌써 80여명 되는 귀농인구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했다. 400명이 조금 넘는 주민 수의 20%다. 마을공동체의 역사를 이어온 주민들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극복 전략을 차분하게 짜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좌절을 경험한 풍력발전시설 사업은 아픔이 컸던 모양이다. 마을목장 부지에 수익사업을 위한 풍력발전시설을 준비하고 공사단계까지 갔지만 인접한 지역 영농법인의 지독한 반대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영농법인이 올해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을 경악하게 한 유병언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지자 난산리 주민들의 심정은 여러 면에서 남다르다. 인접한 이해관계 상대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태양열 발전시설 계획을 준비하면서 생산된 전력을 구매해줄 한전을 찾았지만 성산지역 변전소 용량이 충분하므로 사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를 찾아가 호소하였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난산리 주민들의 궁금증은 하나다. 제주에서 생산된 전기를 제주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정녕 없는 것인가? "누구를 위한 법이냐?" 물으면 갑을 향한 을들의 욕설로 치부하는 모양이다. ![]() 건축미를 자랑하는 마을복지회관. ![]() 김봉의 난산리장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난산리의 최고 경쟁력은 아직도 원형을 잃지 않고 있는 농로길이라고 한다. 경승지 감각에서 탈피하여 힐링을 추구하는 탐방객들에게 정감어린 작은 소로길들을 아름답게 제공하는 것. 난산리는 소박함으로 승부할 수 있는 최적의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가지고 있는 난초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부가가치를 높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번잡한 것을 피하고 싶은 고객은 충분하게 성장하고 있으니까. 마을전체가 올레코스라고 해도 무방한 마을이 있다면 난산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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