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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안녕하십니까
[제주살이, 안녕하십니까](1)프롤로그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15. 01.01. 00:00:00

보이지 않는 미래와 답답한 노동구조에 대한 절망을 체험하고 작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을 꿈꾸며 거침없이 제주로 향한 이들은 결국 현실의 벽과 부딪혀 제주를 떠나버리게 된다. 대신 그 현실을 넘어보자고 한 이주민들은 생활의 규모를 줄이고 건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데 무게를 둬 제주살이를 이어간다. 사진은 하늘에서 바라본 서귀포시내와 한라산. 사진=한라일보 DB

왜 그들은 섬을 택했나
제주다운 가치에 그 답

유배와 단절의 섬 제주
이제는 살고 싶은 땅으로
지속가능한 이주민 삶은
곧 제주인의 행복과 닿아

"'탐라'라는 일개 섬은 아득히 커다란 바다 가운데 있는데 풍토병과 전염병이 뭉쳐 있고, 바다의 해독이 찌는 듯한 곳이다. 겨울과 여름을 가리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반드시 산안개가 끼어 맑게 갠 날이 지극히 적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회오리 바람이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는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으나 섬 사람들은 별로 근심하는 바가 없다."

조선 선조의 7남인 인성군의 셋째 아들인 이건. 광해군 복위모임에 가담한 부친의 죄에 연좌돼 1628년 제주도로 유배와 8년 간 지낸 인물이다. 그가 유배 기간에 썼던 '제주풍토기'에는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주섬의 거친 풍토가 그려져 있다. 제주섬에 발붙이고 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일러주는 기록 중 하나다.

▶"아득히 커다란 바다 가운데 탐라"=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던 유배인의 처지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눈에 비친 풍경엔 화산섬을 일구며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의 힘겨운 삶이 겹쳐진다. 이건은 제주 여인들이 한데 힘을 합쳐 수십말의 곡식을 찧으면서 부르는 노래 소리마저 슬프고 처량해 들을 수 없다고 했다.

호남의 동쪽, 영남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 바다에서 수천리 떨어진 격절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제주. 그래서 일부 관리를 제외하면 이 땅에 발디디는 일은 정부에 낙인찍힌 패배자임을 확인하는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이건은 400년쯤 뒤 제주가 오늘날처럼 변할 줄 알았을까. 너도나도 제주섬으로 모여드는 '이주 열풍'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의 풍속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주 1세대 가난 벗으려 제주행=제주 인구는 이미 2013년 말 60만명을 넘어섰다. 그해 60만4670명이던 제주 인구는 6개월 사이 8035명이 늘어난다. 이는 제주로 이사하는 '육지'사람들과 외국인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시·도에서 제주로 전입하는 순유입 인구는 지난해 상반기 5233명을 기록했다. 2013년 연간 순유입 인구의 66.9%에 이르는 수치다. 외국인 증가세는 더욱 눈에 띈다. 2013년의 경우 상반기까지 757명이 늘었으나 지난해 같은 기간엔 그보다 갑절 많은 1557명이 늘었다.

제주 이주 1세대는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이유가 컸다. 제주발전연구원 문순덕 책임연구원이 1950년대부터 1989년까지 제주로 이주한 1세대 이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주 이주민의 지역 정체성 정립에 관한 기초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이주민 1세대는 다수를 차지하는 호남인을 비롯 이북도민, 충청인 등 여러 지방 출신들이 많았다. 이주 목적은 경제적 빈곤 탈피, 고향을 떠나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 취업 등으로 조사됐다. 당시 제주는 경제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였고 서귀포지역에선 감귤산업 부흥으로 노동력이 필요했다.

삼성신화의 세 신인이 그랬듯 제주는 지금 바닷길로, 하늘길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주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제주로 전입한 이들 중엔 40~50대가 가장 많은 32.9%를 차지했다. 전년도 30.2% 보다 소폭 올랐다. 20∼30대도 전체의 25.7%를 차지한다. 은퇴 이후 인생 제2막을 새롭게 열어갈 꿈을 꾸거나 귀농·귀촌을 위해 제주를 택하는 이들 중엔 성공이나 부와는 다른 가치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낭만 이주 아닌 생태 이주에 주목=이광준 바람부는연구소 대표는 제주문예재단이 내는 '제주문화예술정책연구' 13집(2004)에 실린 '문화귀촌·문화이주의 배경과 흐름'이란 글에서 생태문화 이주에 주목했다. 최근에 나타나는 생태문화 이주는 제주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경향을 일컫는다.

이는 낭만문화 이주와 구별된다. 보이지 않는 미래와 답답한 노동구조에 대한 절망을 체험하고 작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을 꿈꾸며 거침없이 제주로 향한 이들은 낭만문화 이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낭만문화 이주는 곧 현실의 벽과 마주하게 된다. 제주 역시 다른 도시와 다를 바 없이 개발이익과 성장을 좇는 자본의 논리가 미치는 곳이란 걸 알게 되면서다. 결국 다른 삶을 살겠다며 제주에 짐을 풀었던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제주를 떠나버린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같은 현실을 넘어보자는 움직임을 보인다. 생활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건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 무게를 싣는다. 제주 이주가 늘어날 수록 제주가 품은 생태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남다른 경관을 빚어온 제주 자연과 문화에 반해 제주살이를 결심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다. 제주에 둥지를 튼 이들이 과연 이 땅에서 즐거이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일은 곧 제주사람들의 현재를 살피는 과정이기도 하다. 제주 사람, 육지 사람 나눌 게 아니라 제주땅의 건강한 삶을 위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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