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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며
[하루를 시작하며]'미래의 제주인' 그 얼굴이 궁금하다
입력 : 2015. 01.07. 00:00:00
"사람+야수성=서양인. 물론 중국인의 얼굴에서 야수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만일 후에 제거 되었다면, 그것이 점점 사라져서 인간성만 남은 것인가 아니면 점차 길이 든 것에 불과한 것인가. 들소가 집소로 바뀌고, 멧돼지가 집돼지로 되고, 늑대가 개로 변한다면 야성이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을 기르는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는 있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다운 것이 물론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러나 부득이 다른 성질을 갖춰야 한다면 나는 가축성보다는 야수성을 띠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의 수식에 들어맞는 것은 오히려 의미가 없다. 사람+가축성=어떤 종류의 사람"

루쉰은 1928년「이이집(而已集)」에서 '중국인의 얼굴에 대하여' 말한다. 소설「아Q정전」에서도 신해혁명 당시 최하층의 날품팔이 농민인 '아Q'의 어리석고 모순된 삶-혁명이 일어나자 실제로는 혁명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혁명군처럼 거들먹거리며 불합리한 현실 속에 순응하는(무정체성, 소영웅주의 정신승리법)-을 그리고 있다. '아Q'는 끝내 도둑으로 몰려 어이없는 최후(서구열강의 침입 속에서 무기력한 중국인의 모습)를 맞이하지만 지주의 모습은 언제나 끄떡없이 군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신해혁명의 좌절을 상기시켰다.

필자는 2014년 갑오년 말미를 장식한 제주도와 의회가 서로 꼬나보는 '갑(甲)'의 힘겨루기를 지켜보면서 '고래싸움에 새우등만 터지는' 현대판 제주인 '아Q'를 보고 말았다. 도민들이 한 표를 던져 주권을 행사한 결과는 막장드라마였다. 지난날의 중국인 '아Q'가 야수성을 회복한 얼굴로, 돈맛으로 길들일 가축성 '아Q'의 지주가 되기 위해 제주를 향해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이 시점에서, 제주의 '윗물'들이 더 먼저 '보통사람'들을 '얼뜨기·아Q'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물밑작업을 관행처럼 일삼아온 흐린 '윗물'과 질 낮은 '먹물간판자격증'들이 모자란 인덕을 과대 포장한, 지나치게 입에 발린 '정치적립서비스경영'으로 도민들의 귀를 중독시키고 정신을 오염시켜 만들어낸 결과였다.

도민들이 직접 칼자루를 쥐어준 '윗물'의 권위주의는 어떤 공적 질서도 대변하지 않았다. '먹물'들은 대중 민심 지향적이었고 '보통사람'들은 위험 회피적이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이룩해놓은 미덕인 '공익을 위한 희생'보다는 자기가 저질러놓고 '남에게 책임 전가'하는 일이 압도했다. 기존의 '사회 중심 공동 담론'에서 '지배 세력 중심 담론'으로 파행되면서 제주사회는 무질서가 팽배해 도덕적 정당성은 실종되고, 법적 정당성이란 바탕 위에 사회적 정당성(실리주의, 공리주의)만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의 경우, '인종차별금지'라는 보편적 인류의 도덕적 정당성을 법적 정당성으로 바꾸기 위해 당시 사회적 정당성(남부의 노예경제)에도 불구하고 법적 정당성(국회의 동의)을 얻기 위해 부정불법(물밑거래, 공갈협박)을 썼음에도 모두가 동의하고 감동으로 이끈 승리의 바탕에는 '올바른 민주사회는 도덕성이 가장 큰 정당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을미년이 시작됐다. 제주 윗물들의 '갑(甲)질'에 대한 제주민 '을(乙)의 따끔한 대응'을 보여줄 차례다. 어쩌면 '인덕을 갖춘 전문행정인 급구'가 우선책일지도 모른다. 다만, 루쉰의 입을 빌리자면 "지상에는 본래 길이 없고 그곳을 걷는 사람이 많으면 길이 된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도민들 스스로가 주권을 발동시켜 새로운 길을 찾아, 현실의 보수적 습속을 통렬하게 비판·공격하면서, 미래의 제주인 "어린이를 구하라." <고춘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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