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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며
[하루를 시작하며]나는 또 다시 시작한다
입력 : 2015. 03.04. 00:00:00
봄이 왔다. 새해를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온전한 두 달이 지났다. 미동도 없이 와버린 춘삼월, 세월의 빠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나는 연초에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설계로 가슴이 벅찼었다. '올 일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물론 그 계획의 대부분은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와 관련된 공적인 것이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가슴 한켠에 꾹꾹 눌러두었던 소소한 개인적 바람들, 나는 이들을 계획의 틈새마다 빼곡히 밀어 넣었다. 평생을 쫓아다니는 트라우마처럼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외국어에 대한 미련, 하루 종일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는 부동적 신체습관, 쉰 살을 넘기고도 늘 자신을 옭아매는 자발적 강박증, 빡빡하게 살아오는 동안 누적되었던 부족함의 집합들이 앞다투어 밀려왔었다.

혹여 나이가 들면서 갖고자하는 부질없는 욕심은 아닐까. 그러나 내 몸속에는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톡톡 터지는 팝콘처럼 그 무언가가 튀어오르며 나를 들뜨게 했었다. 모래알 같이 소소한 신년의 결심과 각오들, 나는 이들로 인하여 해가 바뀌면서 가슴 시려했던 세월의 공허함과 나이듦의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찰진 안정까지도 스스로 찾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3월이 된 지금, 그토록 고민해서 마련했던 신년 계획은 뚜껑도 열어보지 못하고 동면 중에 있다. 연초에 집에 발생한 갑작스런 가스폭발의 우환으로 나는 칠흑 같은 사십일을 보냈다. 마음은 회사에 몸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간병에, 그리고 온 정신은 사고처리에 쏟아 부어야만 했었다. 퀭한 두 눈과 더부룩한 흰머리에 만나는 이마다 괜찮은거냐 물어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던가. 나는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였고 내 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일상과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에 답답하고 서운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음력설을 맞았다.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오고 가는 민족의 대이동, 개개인의 현실적 안위와는 상관없이 찾아뵙고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 가문과 친지들, 사고 수습으로 경황이 없는 나 역시도 예외일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내키지 않던 설명절의 바쁨과 고단함 속에서 진정한 위안을 얻었다. 바쁜 삶을 핑계로 찾아보지 못했던 내 존재의 발원지, 나는 불시의 사고를 기점으로 돌아가신 친정부모님께 새배까지 드릴 수 있었고 어지러웠던 마음을 평정하고 일상에 복귀할 수가 있었다. 타인의 부주의로 인해 가족 모두 겪었던 고통은 말할 수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같은 하늘아래 가족이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고가 그 정도에서 끝나 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움츠렀던 겨울이여 가라, 힘겨웠던 묶은 해도 가거라. 두 번의 신년 의식을 치른 후 어렵게 맞이한 을미년 새 봄이 아니던가. 사계절의 시작이자 만물이 움트는 원초적 출발점, 신(神)이 내어준 세번째 기회를 나는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비긴 어게인(Begin Again), 나는 또 다시 시작한다. <허경자 서귀포문화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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