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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路 떠나다]제주시 조천읍 서우봉 둘레길
오름 한바퀴 돌다 눈에 들어온 바다 빛깔 ‘황홀’
최태경 기자 tkchoi@ihalla.com
입력 : 2015. 07.31. 00:00:00

서우봉은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해안에 위치한 오름으로 둘레길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위). 둘레길 곳곳에 주민들이 센스있게 쓴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아래). 최태경기자

주민들이 쓴 ‘제주어 이정표’ 눈길
인생의 과거·현재·미래 담은 문구

"가벼운 발걸음 끝엔 묵직한 감동"

서우봉 둘레길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왠지 모를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는 길이었다.

왜 그랬을까.

서우봉(犀牛峰)은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해안에 위치한 오름이다. 높이는 해발 111m로 함덕해수욕장 동쪽 바다에 이웃해 있다. 남사면은 비교적 완만하고 북사면은 바다쪽으로 절벽을 형성하고 있다. 북쪽 봉우리에는 조선 시대에 축조한 봉수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입산봉수, 서쪽으로는 원당봉수와 교신했다고 한다.

서우봉은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한 형상으로, 예로부터 덕산으로 여겨져 왔다. 동쪽기슭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동굴진지가 여럿 남아 있기도 하다.

야영장과 해변을 가로질러 300여m를 오르다 보면 서우봉 둘레길과 산책로로 나뉜다. 둘레길은 왼편으로 바다를 조망하며 가볍게 걸을 수 있게 740여m가 잘 정비돼 있다. 산책로는 더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서모봉과 망오름 주변으로 한바퀴 돌 수 있다.

요즘처럼 '푹푹' 찌는 날씨에 산책로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을 택했다. 서우봉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센스 넘치는 문구들이 더운 날씨에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메께라! 삼춘 왓수광?'(어머나! 삼춘 오셨습니까?), '놀멍 쉬멍 줏엉갑서', '졸바로 봥 갑서게 푸더지믄 하영아파'(똑바로 보고 가십시오. 넘어지면 많이 아픕니다). 제주사람들은 물론 제주어를 잘 모르는 외지인들도 제주어 이정표를 읽다보면 오르막이 오르막이 아니다.

'두렁청이 어디로 가잰 햄수광?' 정비가 안 된 사잇길로 혹시나 빠질까 걱정되는지 '출입금지' 의미를 담은 문구로 길도 막아 놓았다.

제주어 문구들을 읽다보니 어느덧 산책로와 둘레길 교차로에 다다른다. 더 가지 않아도 좋다. 그냥 이정표 바로 위에 있는 정자에서 쉬어도 그만이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한라산과 해수욕장, 그리고 쪽빛의 바다는 지중해에 온 듯한 느낌까지 받는다.

가벼운 산책느낌으로 걷기 위해 둘레길을 택했다. 굴곡이 없는 평탄한 길. 발길을 옮기자 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나의 꿈에 대한 물음이었다.

'혹시 저버린 꿈이 있나요?'

경치를 보며 옮기던 발걸음은 생각에 잠긴 탓인지 느려진다. 나의 꿈은 무엇이었지? 사색에 잠겼다 다시 마주한 문구 탓에 또다시 멈짓한다.

'그 꽃은 무엇보다 아름답다.' 던져주는 메시지를 해석하다 보니 '추억의 의자'라는 문구앞에 덩그러니 벤치가 놓여 있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공간일까. 의자에 앉으면 탁 트인 제주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쉬면서 회상에 잠겨보는 것도 좋겠다.

다음은 어떤 메시지가 기다릴까. 나무계단을 오르려고 하는데 계단 중간중간 또다른 문구들이 나를 맞이한다.

'나에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당신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다'

의미심장하다. 내 인생에서 내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그대여…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다음을 위한 쉼표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재충전이 되는 듯하다. 서우봉 둘레길. 10분이 될 수도, 1시간이 될 수도 있는 사색의 길이었다. 삶에 지친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고 잠시 제주바다와 한라산을 보면서 쉼표를 찍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가볍게 시작한 산책은 되돌아오면서 묵직한 그 무엇인가를 느끼게 한다. 이게 제주가 주는 힐링의 진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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