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n라이프
[독서대담/책과 함께 커가는 제주]'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인의 700일 이야기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5. 12.04. 00:00:00
기억을 잃는 과정 결코 슬프게만 표현하지 않아
치매환자 가족과 주변인물 반응 섬세하게 묘사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저자=리사 제노바

▶ 앨리스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미국의 상류층 지식인이다. 부부가 모두 하버드대 교수이고, 큰 딸은 법대, 둘째 아들은 의대 출신에 막내딸은 배우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알츠하이머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완벽한 삶을 영위하던 앨리스는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이 책은 2003년 9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애잔하고 담담하게 그린 소설이다.

▶저자는 하버드 대학에서 신경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80대였던 할머니의 알츠하이머 소식을 접하고 놀라움과 충격을 받았던 저자는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알츠하이머를 겪는 할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이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환자의 가족들에게도 큰 어려움을 주지만, 정작 가장 힘든 것은 환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억을 잃어가는 슬픈 과정이지만 결코 슬프게 표현되지 않은 소설이다. 이 책을 통해 주인공 앨리스와 함께 울고, 웃고 때로는 앨리스처럼 기억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제주에서 한해의 시작은 성산일출이고 그 마지막은 감귤 수확이라 생각된다. 계속된 비날씨로 인해 농심이 걱정되지만 잠시 시름을 접어두고 독서대담은 진행됐다. 서귀포 안덕 서광동리에 있는 마을감귤창고 카페에서 박지숙(48세)씨와 시작된 책 이야기는 제주와 책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알게 해준 시간이었다. 점심을 지나 느지막이 시작된 독서대담이 끝날때쯤 창문너머 석양이 눈을 황홀케 했다. 숨막히는 감탄을 안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고세훈(56·서귀포시민의책읽기위원장· 이하'고')= 본인 소개를 부탁합니다.

▶박지숙(48·제주 귀촌 3년차 주부)= 3년 전에 제주에 와서 구억리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세 아이들과 알콩달콩 살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그리고 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제주가 가장 좋은 거 같네요. 열심히 살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나를 잊고 살아왔다는 삶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주에서 쉬멍놀멍 자연스럽게, 때로는 치열하게 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고=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박= 처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상당히 우울했습니다. 왜 이런 책을 골라서 대담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삶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들춰내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죽음과 대면하도록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이 하늘을 쳐다보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 '하늘을 쳐다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박=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죠. 이전에는 죽음을 막연하게 여겼는데, 이 책을 보고 구체적으로 실감했습니다. 당장 죽음이 올 수도 있더군요. 그렇게 온 죽음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떨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각자 죽음에 다다르는 길은 다를 수 있지만,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 하늘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고= 책을 덮고 한참 지나도 우울한 책이었나요.

▶박= 우울함 이후에는 먹먹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자신만만하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삶을 산 하버드대 종신교수가 기억을 잃어가면서 그 과거를 붙들려는 과정이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죽을 때는 여전히 지금 저의 상태로 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희망을 주는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 가까이에서 치매 환자를 본 적이 있으신지요.

▶박= 다행스럽게도 없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분별을 못하셨는데, 이미 80세 이상 때의 증상이었습니다. 남편 쪽에도 없었습니다.

▶고= 통계를 보니, 지난해 전국의 치매 환자는 61만 명이더군요. 2030년에는 국민 4명 당 1명이 치매에 걸릴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하더군요. 치매는 기억을 좀먹는 괴물로, 환자는 과거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환자 주변인들은 그런 환자 때문에 떠나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현재로는 치료약도 없지요. 이 책이 희망을 노래하는 책이 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겠군요.

▶박= 얼마전 TV에서 치매에 걸린 엄마와 돌보는 딸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봤는데,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엄마가 치매에 걸렸지만 오히려 딸을 챙겨주었는데, 모성은 치매에서도 발휘된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치매 환자도 충분히 귀한 삶을 살 수 있는 성숙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 책은 치매환자인 앨리스를 둘러싼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반응이 섬세하게 묘사됩니다. 모든 유형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유형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얘기를 해볼까요. 우선 가장 중요한 남편 존의 자세는 어떠했나요.

▶박= 주인공인 앨리스가 치매를 인식하기 전의 모습, 다시 말해서 오늘을 열심히 사는 현대인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앨리스가 치매 걸리기 전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욕망을 불태우는 모습이죠. 앨리스가 남편에게 안식년을 갖고 자신과 일년 동안 함께해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지만, 존은 앨리스가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식년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앨리스는 현재의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데, 존은 새로 일하게 될 뉴욕에 함께 가자고 합니다. 자신의 일과 성취를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앨리스는 만약 존이 같은 병에 걸렸다면 자신은 존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 책에 그려진 남편 존의 태도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박= 그 상황이 아니면 판단이 어렵겠지만, 제가 앨리스라면 무척 섭섭했을 것입니다.

▶고= 막내딸의 얘기를 해볼까요. 앨리스는 막내딸이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연극을 한다는 것에 매우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에 걸린 뒤에는 막내 리디아를 점점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박= 가족도 못 알아보는 상황에서 리디아를 배우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부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디아가 엄마에게 자신의 연기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느낌이 어떤지 말해달라고 합니다. 앨리스는 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다는 대답을 합니다. 아주 감동적이죠. 치매환자도 인간의 느낌과 감성은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고= 막내딸을 연극배우로 설정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몸의 예술인 연극을 하다 보니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거라는 거지요.

▶박= 네. 리디아는 엄마의 병을 알고부터 가장 희생적이고 이해심 많은 자세를 보여줍니다. 큰딸인 애나는 동생을 시기하는 마음도 있고, 희생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그래서 동생보다 엄마를 덜 이해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고= 책은 앨리스와 존, 리디아와의 관계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인물들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어떤 장면인가요.

▶박= 치매 학회의 강연입니다. 자신은 어떤 날을 기억하고 어떤 날을 지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일 잠이 깨서 남편을 몰라보면 어쩔지 다가올 내일이 두려울 때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곧 인간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기억하는 것 그 이상의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기억을 잃고 인간성을 잃어가더라도, 과거의 행적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고= 저도 그 장을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그밖에도 섬세한 심리묘사와 재미있는 상황 설정 등, 읽는 재미가 도처에 많습니다. 생각할 여지도 많습니다. 책에 대해 좋은 얘기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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