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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전 제주식물 세계화 획기적 업적
기획/보물섬 제주, 우리는 왜 이들을 외면하는가
2.제주 식물자원 세계화 주역 타케 신부(중)
강시영 기자 sykans@ihalla.com
입력 : 2016. 03.01. 14:55:36

타케신부가 제주에서 사목활동하는 모습

1908년 왕벚나무 자생지 첫 발견 제주 원산지 단초 제공
타케신부 학명 제주식물도 13종… 유럽서 논문으로 발표
1911년 온주밀감 첫 도입 식재 서귀포 감귤주산지 공로



제주의 식물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제주 선교역사와 때를 같이한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타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신부다. 그는 엄택기(嚴宅基)라는 한국명도 갖고 있어 '엄신부' '엄 에밀리오 신부'로 불렸다.

 타케는 1873년 10월 30일 벨기에 국경 가까운 프랑스 루르드 주에서 태어나 1892년 9월 23일부터 1897년 9월 27일까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수학·졸업과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신부로서 첫 임지인 한국으로 부임하기 위해 파리를 출발한 것은 신부로 임명된 당시인 24세 때로서 1897년 10월 28일이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는 1898년 1월 5일에 도착했다. 그해 4월 부산 초량(현 범일) 본당의 3대 주임을 역임했으며 밀양, 김해, 진주, 거제도, 마산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타케가 제주에 부임한 것은 광무5년(1901) 제주 전역에 걸쳐 천주교도와 도민이 무력 충돌한 '이재수란'(신축교안)이 발생한 이듬해인 1902년 4월 20일. 타케는 1902년 '한논'(서귀포시 호근동 하논)본당의 3대 주임으로 부임한 후 그해 6∼7월 사이에 본당을 홍로(烘爐)로 옮긴다. 홍로는 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 일대다. 그는 1915년까지 13년간 대부분의 기간을 이 곳(복자수도원 면형의 집)에서 지내며 선교 활동과 함께 왕성하게 식물 채집에 나선다. 타케가 머물던 홍로 본당이 선교 역사 뿐만 아니라 제주 근대식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긴 공간으로 회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쉽게도 채집자료 상당수는 4·3때 불쏘시개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타케신부가 서귀포 재임중 주교에게 보낸 육필 서한. 한라일보 DB



 타케는 1915년까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집중적으로 제주도의 식물을 채집한다. 그가 채집한 표본은 유럽 각국의 대학이나 박물관에 매각되거나 기증되면서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세계 식물사에 제주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표본을 보내 얻은 수익금으로 포교사업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비박사 석주명은 한 기고문에서 "타케가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濟州島 식물채집조사가로서 오히려 유명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타케의 서귀포 재임중 행적은 당시 그가 뮈텔주교에게 띄운 여러 통의 서한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뮈텔주교는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다. 이 서한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65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타케가 작성한 것으로는 모두 18통이 전해지고 있다. 타케의 서한은 당시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타케의 서한은 '한논'에서 작성된 것이 1통, 제주에서 작성된 것이 6통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로에서 작성된 것이다. 특히 타케의 서한에는 식물채집과 그 표본을 서구에 보내는 과정, 식물을 팔아 선교비용으로 충당하는 내용 등 제주도의 식물이 서양으로 진출하는 역사가 생생히 기록돼 있어 관심을 끈다.

 식물학계에서는 타케 신부가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도 포교에 종사한 때가 한국식물분류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때라고 평가한다. 제주도 특산식물인 왕벚나무도 타케가 1908년 4월 14일 관음사 일대에서 채집한 표본(표본번호 4638번)을 기준으로 독일의 케네(Koehne) 박사가 왕벚나무로 감정함으로써 이 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설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표본은 자생 왕벚나무의 표본으로서는 최초이다.

 타케는 제주 체류기간 하루에 여덟 시간씩 식물조사에 몰두했다고 한다. 때로는 그 이상 식물채집과 표본 만들기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식물채집에 푹 빠져 심심할 사이가 없으며 오히려 심신이 편안하다"고 뮈텔주교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그가 채집한 수많은 종류의 식물표본은 유럽 등으로 보내어져 전공 분야에 따라 각 전문가들의 흥미로운 연구자료가 된다. 이 표본을 연구한 수많은 논문이 프랑스는 물론 영국, 독일, 덴마크, 스위스 심지어는 일본에서까지 발표되었다.

 전북대 선병윤 교수는 한국식물분류 역사를 정리한 저서에서 "타케가 보내 신종으로 명명된 식물들 중에는 섬잔대, 한라부추, 왕밀사초, 두메담배풀, 섬잔고사리, 반들고사리, 갯취, 좀갈매나무, 제주가시나무, 사슨딸기, 해변취, 한라꿩의다리, 뽕잎피나무 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채집한 것들 중에는 제주 특산식물이 많이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섬잔대(Adenophora taquetii Leveille)', '뽕잎피나무(Tilia taquetii Schneider)'처럼 그를 기념해서 붙여진 학명도 13종이나 된다.

 타케의 제주도 식물 채집은 1907년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은 제주에 오기 전인 1911년에 아오모리의 포리 신부 집에 35일간 머물면서 이 채집품을 감정했는데, 그 양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이는 포리 뿐만 아니라 1913년 제주에 처음 오자마자 타케를 찾아 채집품을 감정했다. 나카이는 1914년 제주도 식물상을 처음 집대성하는 등 제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식물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으로부터 온주밀감을 들여와 서귀포지역이 감귤주산지로 성장한 시초 역시 타케 신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가 100여년 전인 1911년의 일이다. 근대적 의미의 제주감귤 재배의 시작이다. 그가 도입한 온주밀감은 역시 프랑스 출신 성직자로 일본 아오모리에 주재하던 '포리'(Faurie R. P, 1847∼1915) 신부로부터 받은 묘목이다. 타케는 모두 10여그루의 온주밀감을 심었으나 지금은 옛 서홍성당 자리에 1그루만 남아 있다.

 타케는 1915년 6월 제주에서 목포본당으로 전임되어 활동하다가 1922년부터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곳에서 1940년에 은퇴한 뒤 1952년 1월 27일 영면했다. 1964년 12월 교구청의 화재로 보관중이던 식물표본과 식물학분류 자료들이 소실됐다. 그의 묘는 현재 대구시 남구 남산동 천주교구내 성직자 묘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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