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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억압의 시대 건넜던 수많은 청춘들이여
70년대 배경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영초언니'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17. 05.26. 00:00:00
독재정권 아래 몸바쳐 싸운 이름없는 투사들의 기록

수의를 입은 채 특검조사를 받으러 가던 최순실이 외쳤다.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너무 억울해요!" 순간 그의 머릿속에 40여년 전, 영초언니의 모습이 스쳤다. 호송차에서 내린 뒤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곤 곧장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막혀 발버둥치던 언니….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쓴 '영초언니'는 그 언니에 대한 이야기다. 1970년대 같은 대학 선배였던 실존인물 천영초는 그에게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이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한때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지금 영초언니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초언니'엔 영초언니를 주축으로 지금껏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운동권 여학생들의 투쟁사'가 펼쳐진다. 당시는 성차별이나 성희롱이 빈번했고 데모할 때 남학생에게 돌을 날라주거나 물을 떠다주는 여학생들의 활동이 미담이 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기에 영초언니의 아이디어로 '가라열'이 꾸려졌다. 여자들끼리 책도 읽고 토론도 하자며 만든 모임이다. '가라, 여성 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 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를 꿈꾸는 10명이 모였다며 '가라열'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라열'은 학내 시위를 주도한 핵심 멤버의 구속으로 해산되지만 여성문제를 연구하자는 취지로 '여연'이 생겨난다.

1979년 4·19기념일을 앞두고 영초언니가 돌연 연행된다. 독재정권의 기획수사 결과다. 지은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구치소에 입감된 두 사람은 신체적인 고문과 회유 등을 겪으며 지옥의 시간을 건넌다.

영초언니는 지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은 채 서너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영초언니의 모습은 억압의 시대에 청춘을 보내며 몸과 마음이 망가졌지만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도 얻지 못한 채 잊혀져간 수많은 이름없는 투사들의 처지와 닮았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박정희시대의 독재에 맞서 싸웠던 젊은 날의 모든 일들이 역사로부터, 국민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느낌이었다는 그들이다. 문학동네. 1만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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