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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 간 아들을 보고 왔다. 본인 걱정은 말라는 아들아이의 당부에 3년이 되도록 맘 편히 있었다. 그러나 실은 회사 일에 정신없어 아이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음이 맞다. 그저 스마트폰으로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으며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다는 말로 입대한 자식에 대한 시름과 그리움을 대신했다. 그런데 카톡에 올라온 녀석의 얼굴이 홀쭉해졌다. 남들은 군대 가서 오히려 몸이 좋아진다던데 녀석의 뾰족해진 턱과 커다란 눈망울에 내가 무심했구나 갑자기 콧등이 시큰했다. 식사는 잘 챙기냐는 물음에 취식은 군인의 기본의무라며 녀석은 웃었다. 그런데 왜 살은 빠졌냐는 추궁에 아마 집밥이 먹고 싶어 그런거 아니겠냐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국만리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본인보다 나를 걱정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나는 군대는 현역으로 가야 한다며 녀석을 귀국시켰다. 그리곤 국가가 있는데 장성한 군인을 걱정할 일이 뭐 있냐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런데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집밥이란 말이 명치에 매달려 며칠을 웅웅거렸다. 중학교 이후부터 내내 집을 떠나있던 녀석이 아니던가. 어느새 멀게만 느껴졌던 3년 3개월의 병역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들아이가 있는 부대는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었다. 논과 밭들이 펼쳐져 있을 뿐 주변에 변변한 가게나 식당조차도 없는 농촌마을이었다. 나는 부대 안에 있는 방문자 숙소에서 1만원을 내고 하루를 묵었다. 이른 아침 확성기에서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랫소리에 잠을 깨고 연이어 들려오는 쇳소리, 비행훈련의 이착륙 굉음에 귀청이 터지는 듯 했다. 비행단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아들의 안내로 국밥을 먹고 부대시설을 돌아보던 중 자신이 근무하는 곳이라고 자랑스레 가리킨 곳, 그곳은 위장벙커였다. 창문 하나 없는 그곳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장교로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가족 모두 속편했었다. 아마 정상적인 사람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기관지가 좋지 않은 녀석이 폐쇄된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냈으니 건강이 좋을 리 없다. 얼마 전 목이 자주 부어 근무에 불편하다며 편도선 절제수술을 받아야겠다는 아들에게 몇 달 지나면 제대인데 군복무 중에 무슨 수술이냐며 면박을 주었다. 많이 아픈 건 아닌지 왜 수술까지 생각했는지 챙겨야했는데 나는 의연한 어머니인척 충실한 군생활만 강요하였다. 게다가 주말이면 가끔 서울로 올라가 친구를 만나는 녀석을 철없다 생각했다. 주중에 복무를 마치고 주말에는 책도 보고 좀 쉬기라도 하지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리는 녀석이 내심 못마땅했음이다. 그러나 막상 녀석이 근무하는 부대를 방문해 보니 모든 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몇 년 전 갑자기 회사의 대표를 맡으며 고객보다 임직원의 마음을 먼저 읽는 마더리더십(Mother Leadership)을 가져야겠다 결심하고 나는 실천했다. 그런데 정작 군대에 가있는 내 아이에게는 냉철한 지휘군관처럼 엄격하게만 대해왔던 것이다. 유난히도 국가안보가 빅이슈였던 한해다. 대선을 치르며 이에 대한 논쟁도 극심했었다. 더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공군은 얼마나 상황이 급박했을까. 그에 몸담고 있는 아들아이 또한 얼마나 정신적으로 긴장했을까. 집에서 철부지라 생각했던 녀석 그리고 또래의 군인병사들, 나는 그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고 있다. 자식을 군에 보내고도 알지 못했던 현실, 제대를 앞둔 시점 부대방문을 하고서야 깨닫게 된 진실로 나는 목전의 손익에 균형을 잃었던 일상에 평형수를 채운다. 어느새 신록이 푸르른 6월, 보훈의 달이 왔다. <허경자 ㈜대경엔지니어링 대표>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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