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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노 시인의 원숙한 시적 상상력을 맛보다
'시의 장인' 고은 시인의 연작시집 '어느 날'
조흥준 기자 chj@ihalla.com
입력 : 2018. 01.26. 00:00:00
어느 한 분야를 오랜 세월 매진해 전문가의 경지를 뛰어넘게 되면 장인이라 부른다. 고은 시인은 시의 장인이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시에 매진해 온 그가 한순간의 단편적인 시간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포괄하는 일체적 시간으로써 '어느 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217편의 연작시집으로 찾아왔다.

'어느 날'은 그간 고은 시인이 추구해 왔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노년의 삶에 대한 허무함과 시에 대한 원숙한 의식을 전경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해 시인으로서 갖는 시적 자의식은 그가 일평생을 시와 함께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시와 언어에 대한 결핍을 통해 궁극적으로 시를 창작해내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 노년의 삶을 통해 비춰지는 시어들은 허무감을 넘어 인생의 본심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말하는 '허무주의' 또한 세상에 대한 통찰과 비판을 통해 나온 것이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부정적이라는 소극적 인식이 아니라, 허무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가치를 비정한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구나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죽음'도 그동안 언급했던 '사회적 죽음'과 다른 시간에 얽매인 '나'를 객관화함으로써 유한적 존재인 '나'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함에 가깝다.

시인은 또 그동안 서정, 민족, 민주, 민중, 저항, 참여 등 다양한 주제를 추구해 왔으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로 시 곳곳에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과 부면들에 대한 통찰과 비판, 저항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존재에 대한 애정과 의미부여에서부터 자본과 권력과 물질에 둘러싸인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시와 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르고 고발하고 있다. 반면 그 비판의 대상이 반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인간적인 사회, 디지털 자본주의 사회, 배타주의적 편견 사회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담아낸 인생 성찰과 현실 통찰의 수준 높은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신작 시집은 원숙하고 노련한 장인이 만들어 낸 작품이자, 고은이라는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이며, '어느 날'에 만난 '벅찬 감동의 기록'이다. 발견.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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